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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경인 WIDE-산성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준다·(1)] 여주 술천성의 눈물

'이대로 무너질순 없다'… 수풀속에서 버틴 천년

우리의 역사는 늘 산성(山城)과 함께한다. 산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남의 것과 구분 짓는 경계로 쌓기 시작한 산성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적의 침입을 막고, 또 지방행정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지금은 수원 화성과 성남·광주 남한산성이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일부 산성은 문화재로 지정, 복원돼 공원화되면서 건강과 힐링을 목적으로 또는 과제물을 해결하기 위해 등산과 병행한 산성 탐방 등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산성들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대부분 사유지에 위치해 문화재 지정에 따른 재산권 침해를 우려한 토지주들이 각종 조사를 거부, 역사적 의미도 모른 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경기도 내 산성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 관리의 문제점 등에 대해 짚어본다. → 편집자주 

 

 

 

이포리 수부마을 태봉산에 위치
661년 고구려·신라 치열한 전투
잡풀 무성하고 산길도 나지 않아

서기 661년 5월.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 수부마을(현재 이포1리) 뒷산. 해발 183m의 야트막한 구릉형태의 이곳 태봉산에서 그 옛날 삼국시대, 혼란기를 대표하는 역사적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수하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시켜 용병 말갈군을 이끌고 신라땅으로 넘어간 술천성을 공격하도록 한 것.

삼국사기(三國史記) 필부열전(匹夫列傳) 등에 따르면 고구려의 술천성 공격은 한 해 전인 서기 660년께 신라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위한 복수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당시 전투에서 술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라군을 분산시켜 멸망한 백제 부흥군을 돕는 효과를 톡톡히 얻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주지역의 '어느 곳'으로만 알려졌던 술천성은 학술조사와 지표조사 등의 연구가 거듭되면서 이포1리 뒷산인 태봉산으로 지목되고 있다. 토성으로 지어졌던 당시의 성터 일부는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야트막한 구릉 정상에 위치한 술천성은 일반인이 찾기는 쉽지 않다. 이포1리 마을에서 태봉산 정상의 개인사찰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5분가량을 오르면 도착하는 정상부근에서 다시 10여분을 걸어가야만 토성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곳에 도착한다.

마을과 인접해 있지만 표지판도 없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산길이 나 있지 않아 잡풀이 무성해지는 여름철에는 접근 자체도 어렵다. 

 

반대편 안내판 있지만 길 끊어져
주민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반대편인 이포보 방면에서 진입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여주시가 조성해 놓은 걷기코스와 연결되는 구릉 초입에는 '술천성' 안내판이 설치돼 있지만, 표시된 곳으로 가다 보면 길이 끊겨 더 이상 진입할 수가 없다.


풀숲을 헤치고 술천성으로 추정되는 성터에 도착해도 이름 모를 잡풀에 뒤덮여 성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1천300여년전 삼국시대, 경기남부를 뒤흔들었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역사의 페이지 속에 남아 있지만, 그날의 처절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여태껏 버텨온 성터는 이렇게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주민 A씨는 "뒷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 있다고 어릴 적부터 들어 알고는 있지만, 언제 지어졌는 지도, 대략적인 모양도 알지 못한다"며 "복원을 안 하더라도, 조사를 해 역사적 가치 등을 확인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북부 양주의 불곡산 보루는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군의 침입에 대비, 경계근무를 서기 위해 만들었던 불곡산보루는 모두 9개다. 봉우리마다 성보다는 규모가 작은 보루를 세운 것으로 당시 팽팽했던 삼국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9개의 보루 대부분은 성벽이 무너진 채 석축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다. 또 첫 번째 보루에서 300여m 떨어져 있는 여덟 번째 보루는 붕괴 직전으로 아슬아슬 위태롭게 방치돼 있고, 아홉 번째 마지막 보루로 가는 성벽의 돌들도 붕괴 돼 바닥에 흩어져 있다.

일부 보루는 무너진 성벽 위로 등산로가 형성돼 무수히 많은 등산객들이 석축을 밟고 다니고 있다. → 관련기사 3면([경인 WIDE-산성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준다·(1)] 토지주 거부에 방치된 '복원'… "기본조사 강제화·현실적 보상을"

/김대현기자 kimd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