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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원선의 힐링&여행] 전남 구례 운조루

명당에 깃든 고귀한 정신, 오랫동안 진한 나눔의 향기
안동 출신 관료 류이주 지은 99칸 집…'구름 속에 숨은 새' 유유자적 삶 의미
금가락지 떨어진 터로 '영남 3대 길지'…축대 아래에 굴뚝 지어 富 감추기도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찾아가는 길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눈길이 머무는 산허리로는 산벚나무가 하얗게 흐드러져 꽃등을 밝혔다. 화엄사IC를 지나 국도로 접어들자 따사로운 봄빛 아래서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벚나무가 꽃 터널로 반긴다. 그 모습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팝콘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린 듯 보인다.

 

 

◆영남 3대 길지 중의 하나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에 숨은 새'란 뜻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말하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구에서 승용차로 약 2시간 거리다. 국가 민속 문화제 제 8호인 운조루는 안동출신의 지방관료였던 류이주(1726~1797)가 99칸의 집을 지음으로써 그 역사가 시작된다.

 

운조루를 찾게 된 것은 그간의 역사적 사료를 종합해 볼 때 운조루의 지난 삶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실이라는 확신에서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며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쳐진 것이다.

 

풍수지리학 적으로 볼 때 운조루가 자리한 집터는 영남 3대 길지 중의 하나인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라는 뜻)다.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또는 하늘의 선녀가 잘못하여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한다. 또 동네에는 3개의 진혈(眞穴)의 터가 있는데 그 중 한 터를 금구몰니(金龜沒泥 금빛 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힌 형상을 지닌 터)라 했으며 다섯 보물이 모여 있어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를 창건할 당시 집터를 조성 중에 돌거북이가 출토되고 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은 운조루가 차지한 셈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실

 

명당에 터를 잡고, 벼슬길에 나서고, 금은보옥이 언덕을 이룬다 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일 수는 없다. 이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대구에서 이웃한 경주시 교동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문이 있어 경주 최부자 집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경주 최부자 집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300여 년간 명맥을 꿋꿋하게 유지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을 세웠으며 이를 가훈으로 철저하게 지켜낸 때문이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또한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백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며, 1년간 쌀 생산량이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가용으로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다. 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세 가마니의 쌀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바로 타인능해이다. 즉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 란 뜻이다. 지금이나 흉년이 들면 서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럴 때마다 운조루의 뒤주는 빌 새 없이 쌀로 채워졌다. 배고프고 굶주린 주민들은 물론 귀천이나 이유를 막론하고 쌀을 가지고 갈수 있게 한 것이다. 쌀을 채우는 입구는 집안쪽으로 두어 밖의 사정을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주의 쌀이 줄지 않았다면 종부가 지녀야할 부덕 소치라 여겨 더욱 근신하게 했다..

 

당시 운조루에서 논농사 2만여 평에서 연평균 200가마니 정도를 수확했다고 한다. 이중 쌀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에 36가마 정도다. 이는 1년 소출의 약 18%정도로 없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것이다.

 

 

◆베풀어 온 삶의 짙은 향기

 

그 뿐만 아니라 굴뚝은 추녀보다 높게, 축대보다 높게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이는 연기가 많은 오염물질을 내포하고 있어 집안을 보호하려는 조치인 것이다. 장작이나 솔가리, 죽은 삭정이 등을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맵고, 아리고, 몸에 해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운조루의 거의 모든 굴뚝은 축대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유는 부를 감추려는 배려지심으로 끼니를 거르는 이웃은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만 봐도 서럽기 때문이다.

 

전남 구례는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을 아지트로 한 빨치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지역이다. 그로 인해 인명을 포함 재산상의 피해는 막심했다. 식량은 있는 족족 약탈당했고 누옥이라 할지라도 보이는 데로 재로 변했다. 장정들은 있는 수 데로 끌려가 온갖 허드렛일과 노역에 시달렸다. 목숨을 부지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부지기수로 죽었다. 생지옥과도 같은 시절 유독 운조루 만은 멀쩡했다.

 

 

 

이는 운조루가 베푼 또 다른 선행 때문이다. 한때 운조루 주변으로 25가구, 100여 명의 노비들이 살았다고 한다. 모두가 운조루에 딸린 노비들이었다. 구한말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노비제도는 사라졌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운조루는 1944년 무렵에 이르러 노비문서 전부를 폐기, 전원 양민으로 살게 했다. 이로 인해 운조루는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에 즈음하여 좌익에 가담한 노비집안 후손들에 의해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운조루는 금환락지 또는 금구몰니, 오보교취형의 명당이라 치켜세운다. 하지만 운조루는 '口'형의 사대부가의 평범한 기와집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운조루가 유명한 것은 그동안 베풀어 온 삶이 짙은 향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땅이 지닌 고유의 명당이 향기를 품었다지만 이는 극히 한정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름다운 심성을 품어 명당에 들면 그 향기는 기록에서 기록으로,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오래도록 진한향기를 뿜어낸다. 요순시대의 삼척비가 삼천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향기를 뿜듯 운조루 미래도 이와 같을 것이다.

 

 

◆ 운조루 9대 종부와의 만남

 

삽짝거리에는 할머니 몇 분이 제철나물인 달래, 냉이, 쑥 등등으로 난전을 펼쳤다. 지역특산물인 포고버섯, 엄나무(개두릅)의 새순 등을 박스나 보자기 위에 오밀조밀하게 진열하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전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로 소박하다. 일행 중 한분이 상추를 흥정하는 동안 안으로 들자 1인당 1000 원의 입장료가 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솟을대문 아래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흰머리에 허리는 구부러지고 좁아진 어깨가 가냘픈 듯 여위어 보였다.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언제 왔는지 운조루 9대 종부가 오가는 길손을 맞아 난전을 펼치고 있다. 콩, 팥, 간장, 표고버섯, 쑥 등으로 봄 향을 빌어서 손님을 맞는 것이다.

 

 

"TV에서 뵀습니다"고 하자 "용케도 보셨네요!"하며 잠시 손길을 멈추고 수줍은 듯 환하게 웃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하는 듯 가슴 저 밑바닥까지 훈훈해지는 웃음이다. 고향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할머니와 함께 '삘~리리'호드기가락에 흥을 실어 봄을 예찬하듯 나들이 한번 잘 왔다 싶다. "구경 잘 했습니다"며 돌아서는 어깨 너머로 노랗고 빨갛게 만개한 산수유 꽃과, 동백꽃 향보다 더 짙은 아름다운 삶의 향이 뭉글뭉글 일고 있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

 

특집부 weekl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