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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일생 고난 당한 자 편에 섰던 ‘민주화운동 거목’ … 강신석 목사 별세

[교육 민주화·종교 화합·통일 운동 헌신]
1976년 유신 반대 성명 주도, 1980년 5·18 진실 알리다 수배돼 고초
5·18 특별법·망월동 국립묘지 지정 주춧돌…장애인 인권 향상도 기여

“나는 광주를, 무등산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지난 5일 84세로 별세한 강신석 목사는 일평생 종교, 교육, 통일 등 사회활동에 헌신한 광주지역 대표 원로다. 생전의 그는 광주와 무등산 사랑이 남달랐으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무등산 자락에 거주했다.

고인은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으며 종교·교육·통일 등 전반에 걸쳐 활발한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1992년 한국실로암 선교회 회장, 1994년 광주YMCA이사장, 2003년 5·18기념재단이사장,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07년 5월 광주 무진교회(기독교장로회)에서 자원해 은퇴했다.
 

무엇보다 강 목사에게는 ‘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운 목회자’라는 평가가 따른다.

고인은 1976년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 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했다. 그로인해 동료들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

5·18은 그의 삶에서 떼래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예비 검속으로 수배 명단에 포함됐지만 서울로 상경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일 대사 등을 만나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이로 인해 신군부에 붙잡혀 고초를 당했으며, 보안대로 끌려가 독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강 목사는 김영삼 정권 시절 5·18특별법 제정에도 주춧돌을 놓았다. 당시 100만명 서명 운동을 벌여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명 서명을 받아내는 데 중추 역할을 했다. 또한 5·18기념일 지정, 망월동 국립묘지 지정 등 과정에도 일조했다. 5·18항쟁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우는 데 있어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데 기여했다.
 

고인의 목회 철학은 ‘고난 당한 자와 함께’하는 데 방점이 놓여 있었다. 수감 중인 양심수를 비롯해 미전향 장기수들에게 의류를 전달하는 등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미전향 장기수 가운데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당국과 협의해,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

강 목사는 장애인과 약한 자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한국실로암선교회를 이끌며 시각장애인 인권 향상에 남다른 관심과 활동을 펼쳤다.

교육민주화운동에도 족적을 남겼다. 1982년 광주 YMCA 중등교사회를 만들어 교육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해직교사 뒷바라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이밖에 광주 종교인평화회의 상임공동의장을 맡아 종교 간 화해와 협력에도 이바지했다.

무진교회 부교역자인 박신일 전도사는 “강 목사님은 민주화운동 헌신 외에도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낮은 곳에서 섬김의 신앙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호남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정병석 씨도 “평생 고인은 이웃사랑의 삶을 열매로 보이셨다”며 “코로나19로 적잖은 교회가 지탄을 받는 상황에서 강 목사님의 진정한 이웃사랑 정신은 귀감이 된다”고 밝혔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