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모자이크 유럽을 가다 1 북유럽〉은 남파간첩 출신으로 대단한 문명교류학자인 정수일(일명 무하마드 깐수)의 세계문명 기행서다. 이 책이 품은, 유럽문명의 민낯을 드러내는 유려한 통찰력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책의 기본 생각은 동양과 서양의 우위를 다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공통의 조상을 지닌 인류는 ‘세계 일체성’을 바탕 삼아 숭고한 보편가치를 다 같이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이 선진이고, 동양은 후진이라는 해묵은 통념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선진 대 후진’ 통념은 최근 200년간의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거다. 외려 17세기 독일 라이프니츠와 프랑스 백과전서파는 중국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덕치(德治)의 완벽한 윤리를 갖춘 나라라며 온갖 찬사를 쏟아부었다. 중국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역사는 부침했을 뿐이라는 거다. 다행히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세계사적 사건은 동·서양이 인류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조우한 것으로, 그에 따라 이제 고루 볼 수 있게 됐다는 거다. 남파간첩 출신 저자, 세계문명 기행서 ‘선진 서양, 후진 동양’ 해묵은 통념 타파 헤브라이즘·헬레니즘, 서아시아서 탄생 동·서양 차이, 상이한 자연
부산 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10년간 루게릭병 투병을 해오던 정태규 소설가가 14일 오후 1시께 타계했다. 향년 63세. 그는 무엇보다 빼어난 소설가였다. 휴머니스트이자 인문주의자였으며 삶을 남김없이 살고자 했으며 ‘인간은 실패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병마 속에서도 불굴의 숭고한 삶을 살다가 떠났다. 1958년 경남 합천 출생인 그는 부산대 국어교육과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국어교사를 지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990년대 이후 부산 문단에서 이복구, 조갑상 등과 함께 요산 김정한 이후의 지역문학의 지평을 섬세하고도 힘차게 열어나갔다. 그의 소설 문장은 빛나는 것이었다. 1994년 출간한 첫 소설집 <집이 있는 풍경>은 2014년 <청학에서 세석까지>란 이름으로 재출간됐는데 거기에 실린 문장들은 고통스런 울부짖음과 빛나는 희열이 온전히 느껴지는 아찔하고 서늘한 것들이었다. 그가 쓴 것처럼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써늘하고 안타깝고 거의 감동에 가까운 어떤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문장들이었다. 1996년 많은 선후
부산 금정구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서는 지난 5일부터 12월 31일까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전 ‘내면의 목소리를 신앙의 목소리를’이 열리고 있다. 김대건 신부 관련 200여 점이 전시 중이다. 기념전이 열리는 2층 특별전시실에 들어서니 ‘성 김대건 신부 탐색로’라는 큰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1821~1846) 신부의 10년간 행로는 동아시아에 장대하게 걸쳐 있다. 지도 위에 선으로 그어진 그의 행로가 한국 천주교를 토착화시킨 아득한 고난의 대장정 같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연말까지 동아시아까지 이어진 10년 행로 일대기 그림, 조선 전도 등 전시 그의 행로는 당시 조선의 지평에 없던 필리핀 마닐라까지 이어진다. 김대건은 1836년 15세 때 신학생이 되기 위해 한양에서 만주-베이징-난징을 거쳐 중국 남쪽 선교사들의 거점인 마카오까지 걸어서 갔다. 지향점을 지닌, 당대 조선인 최장의 도보 장정이었다. 그리고 마카오 민란이 일어났을 때는 마닐라로 건너가 신학 공부를 했다. 이후 타이완을 거쳐 만주에서 추위 굶주림 병고와 싸우며 다섯 번에 걸쳐 조선 귀국을 탐색하다가 여섯 번째로 평
1990년부터 문학 활동을 이어온 김길녀 시인이 지난 12일 타계했다. 향년 57세.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음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은 1964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으며 부산예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0년 <시와비평>을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키 작은 나무의 변명>(2001) <푸른 징조>(2013)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가 유명을 달리한 며칠 뒤 마지막 시집으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 출간됐다. 우리 생의 만남과 이별, 사랑과 죽음의 파동 속에서 또 다른 차원으로 조용히 날개를 펼치는 시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한다. 김 시인은 2003년께 유방암 진단을 받고 그동안 투병을 해왔으나 정중동의 열정적인 문단 활동을 펼쳤다. 부산작가회의 사무차장, ‘작은詩앗·채송화’ ‘예감’ 동인, 부산시인연대, 한국해양문학가협회 사무국장, <해양과문학> 편집장, 제1기 바다해설가 등 다방면의 활동을 펼쳤다. 고인은 2009년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김 시인은 2010년대 초반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된 남편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
33년간 한 번도 거름 없이 곳곳 선방서 66번 안거 수행 “부처는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그 너머로 가라" 19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경남 양산 영축산은 날카로운 부리, 매서운 눈의 독수리가 날개를 거대하게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독수리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1982년 출가해 통도사 강사와 2015~2019년 유나(선방의 주지)를 지낸 영일(66) 스님은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독수리가 노리는바, 부처님 오신 뜻이다. 영일 스님은 수행승으로 이름이 높다. 지난 33년 동안 한 번도 거름 없이 66번의 안거 수행을 했다. 안거는 각각 3달간의 하안거·동안거를 말한다. “생각이 문제다. 선 수행에서 몰입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멈추는 것이다. 화두 참구가 제대로 되면 생각을 하지 않아도 화두만 돌아간다. 화두 자체가 스스로 의심을 일으켜 생각이 없는 상태가 쭉 된다. 내가 어느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린다. 그때가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는 상태다.”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아니다. 그 생각 너머 본성, ‘참나’에 직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에서 ‘정각’으로 나아가야 한
부산진(현재 부산 동구) 좌천동 출신의 의사 박재혁(1895~1921). 11일은 박재혁 의사의 순국 100돌이 되는 날이다. 1920년 9월 14일 일제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2·3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박재혁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박재혁은 사형 집행 전 12일간의 단식 끝에 대구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1921년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이었다. 의열단원 박재혁이 순국한 1921년은 우리의 독립운동 노선이 좌우로 분열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박재혁은 더더욱 중요하다. 박재혁이 품은, 온전히 하나였던 조선 독립 정신을 상기할 수 있다면 오늘날까지 파상적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상습적인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현재 지구상의 유일한 ‘냉전의 섬’인 한반도 분단 체제를 그 목숨의 안중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재혁은 과연 무엇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가, 라는 물음은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박재혁은 우리 현대사의 열쇠 말 중 하나다. 부산 근현대사와 정신사에서 박재혁의 자리를 명확히 위치 짓는 것도 필요
27일 90세로 선종한 천주교 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은 1970년 39세 때 청주교구장이 된 최연소 주교였으며, 2006년 고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임명된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이었다. 정 추기경의 가족사와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스친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조직원으로 3년 감옥살이를 한 뒤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광복 후 월북을 해 북한 정부의 공업성 부상을 지내다가 숙청당했다고 한다. 정 추기경이 사제가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한국전쟁 때 목도한 숱한 죽음이었다. 발명가를 꿈꾸며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져 국민방위군에 소집돼 장교로 복무하면서 매일매일 곁에서 죽음을 지켜본 것이었다. 남한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깨져 부대원이 바로 뒤에서 물에 빠져 죽었고, 또 바로 옆에서 지뢰를 밟고 죽은 부대원을 지켜봤고, 극악한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숨진 숱한 주검을 보고서 “나의 것이 아닌 이 생명, 내 생명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기도를 지니게 됐다. 강산을 피로 물들인 그 지독한 전쟁에서 고인은 ‘모두를 위한’ 사제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서울 종로구 출생인 정 추기경의
속보=부산 정신을 집대성하게 될 ‘부산문학관’이 마침내 건립된다는 소식(부산일보 3월 26일 자 1면 보도)에 부산 문학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언어적 고투 속에 담긴 부산 근현대사의 고된 역정을 응축하고 집약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하면서, 6대 광역시 중 유일한 ‘부산의 공립문학관 부재 상황’을 메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늦었으나 공립문학관을 건립한다니 휑한 코로나 시대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게 문학계의 반응이다. 하지만 세부적인 측면에서 부산문학관을 어떤 모양새로 만들 것인지를 두고는 의견 수렴을 통해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현재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낙동강변 장림포구 인근 입지에 복합문화공간을 지으면서 문학관을 포함시킨다는 계획에 대해 첫째 독자적인 문학관을 추진해야 하며, 둘째 입지와 관련해서는 찬반양론이 나오는 양상이다. ■“복합공간 아닌 독자적 부산문학관으로” 먼저 문학계에서는 한결같이 복합문화공간이 아닌 독자적인 부산문학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전 부산문화재단 대표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는 “현재 부산시 계획대로 ‘문학관’과 ‘생활문화센터’, 양자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은 이도 저도
부산 정신의 고갱이를 품은 부산 문학사를 체계화하고 관련 자료를 갈무리할 부산문학관이 신평·장림산업단지 ‘부네치아’ 옆에 건립된다. 부산시가 25일 발표한 ‘신평장림산단 복합문화공간 조성 계획’에 따르면 시는 부산 사하구 장림동 1080 신평·장림산단 부지 2871㎡에 지역밀착형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한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이곳에는 일명 ‘부네치아’(부산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장림포구와 장림생태공원, 강변환경공원이 있다. 복합문화공간은 연면적 7920㎡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문학관’과 ‘생활문화센터’를 포함하는 것으로 돼 있다. 지역 문화계의 숙원사업으로 그동안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던 ‘공립 부산문학관’을 복합문화공간에 설립한다는 구상이다. ‘산단 대개조 사업’에 최종 선정 신평·장림산단 ‘부네치아’ 옆에 2024년까지 국비 등 338억 투입 문학관 포함 복합문화공간 건립 지역 문화계 숙원 사업 결실 앞둬 ‘복합문화공간 조성’은 정부 일자리위원회,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범부처가 협업하는 ‘산업단지 대개조 공모 사업’에 부산시가 계획안을 내서 최종 선정된 것이다. 예산은 총 338억 원으로 국비 250억 원, 시비 88억 원 규모이며
부산은 위대한 곳이다. 바다, 강, 산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가 김동리가 ‘끝의 끝’이라고 칭했던 최후의 땅, 그 고난을 삶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부산문화재단이 출간한 <기억을 품다 흔적을 더듬다-부산의 마을>(호밀밭)은 위대한 땅 부산의 켜와 층을 보여준다. ‘해방 전후’(2편 3곳) ‘한국전쟁 전후’(6편 10곳) ‘1960년대 전후’(4편 4곳)로 시대 구분해서 부산의 이주정착촌 17곳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그 마을 이야기 속에는 고난과 시련의 부산 현대사가 농축돼 있다. 향토사학자 주경업·김한근, 시인 최원준·동길산, 소설가 나여경·배길남, 사진가 박희진, 역사민속학자 류승훈 등 13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부산문화재단 ‘부산의 마을’ 이주정착촌 이야기 담아 피란민 아픔과 눈물 새겨진 초량동 45번지·소막마을 비석·돌산·흰여울마을… 첫째 부산의 많은 이주정착촌은 죽음-공동묘지 터 위에 만들어졌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죽음’ 위에 삶을 세울 정도로 그만큼 절박했던 곳이 부산이다. 비석마을(아미동)과 돌산마을(문현동)은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흰여울마을(영도)도 한국전쟁 때 인근의 피란민수용소가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