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98) 할머니의 별세는 정부의 외교 부재로 남겨진 숙제를 재차 상기시켰다. 생존자는 이제 여섯 명뿐.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사과도, 실질적 외교 협의도 이뤄지지 않은 채 문제 해결은 다음 정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지난 10년간 역대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피해자 중심 해결’을 표방했지만 정작 외교적 협의 방식과 이행 의지에서는 엇갈린 행보를 보여왔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피해자 다수의 반발 속에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가 담긴 합의를 일본 정부와 체결했다. 피해자 입장은 사전에 반영되지 않았고 법적 책임이나 공식 사죄 없이 10억엔이 지급되는 방식은 갈등을 키웠다. 특히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은 국제인권법상 성립할 수 없는 개념으로, 동의 없는 합의에 종결성과 불가역성을 부여한 것은 정당한 협의 절차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더욱이 합의 당시 일본 측이 제시한 10억엔은 법적 배상이 아닌 ‘위로금’ 명목이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은 과거에도 반복됐다. 일본 정부가 책임 인정 없이 금전 지급으로 문제를 무마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고(故) 김학순(1924~1997) 할머니는 생전 마지막 공개 발언에서 “웬 위로금이냐, 정정당당하게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강하게 항의한 바 있다. ‘위로금’이라는 표현에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2015년 한일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공식화하며 해당 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했다. 이후 대통령 직속 태스크포스는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고 피해자 중심의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종료된 사안”이라며 거부했고, 정부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실질적 재협상에는 나서지 못했다. 이로 인해 피해자의 기대와 외교 현실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윤석열 정부 들어 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 현안에서 배제됐다. 2023년 한일 정상회담과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고 공식 의제로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른바 ‘과거는 놓고 미래로 가자’는 기조 아래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장애물로 인식되며 협의 자체가 회피되는 구조로 이어졌다.
외교부의 ‘한일 과거사 대응 및 미래지향’ 예산은 2023년 14억2천600만원에서 2024년 8억1천200만원으로 삭감됐고, 2025년엔 11억4천300만원으로 소폭 반등했지만 이중 3억8천만원은 국교정상화 기념사업 예산으로 실질적인 사업 예산은 오히려 줄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 예산도 2년 새 95% 넘게 쪼그라들며 정부의 소극적 태도가 수치로도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외교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사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교묘한 역사 왜곡을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21년 하버드대 마크 램지어 교수는 일본 자본의 지원 아래 위안부를 ‘계약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 국내외 학계와 인권단체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일본 극우세력은 이를 학술적 근거로 삼아 책임 회피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지난 11일 이옥선 할머니의 별세는 위안부 문제의 시급성과 정치적 책임을 환기시키는 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는 6월 새 정부가 출범하는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은 다음 정부의 외교력과 의지에 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용수(97) 할머니는 지난 14일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1천700차 수요시위 자리에서 “다음 대통령이 되는 분은 대통령이 되거든 제일 먼저 위안부 문제부터 해결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며 “지금까지 일본은 묵묵부답이고, 정부도 우리를 방치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다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