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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폴란드인이여, 목숨 바쳐 마테이코 그림 지켜라”

‘얀 마테이코의 그림 두 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현상금 1000만 마르크를 주겠다. 독일 시민권과 여권도 제공하겠다.’

 

1939년 10월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 사령관 괴벨스는 폴란드 전역에 독특한 내용의 공지문을 발표했다. 공지문은 바르샤바, 크라쿠프, 그단스크 등 주요 도시 곳곳에 부착됐다. 학교, 교회 등 주요 시설에 배포되기도 했다.

 

도대체 얀 마테이코의 그림이 무엇이기에 괴벨스는 이렇게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던 것일까.

 

 

■문화를 없애고 역사를 없애라

 

독일 나치는 폴란드를 점령해 영토를 ‘게르만화’하려고 했다. 폴란드 주요 도시의 건물을 완전히 파괴한 뒤 독일의 미래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첫 시범 도시는 바르샤바였다. 바르샤바를 게르만 도시로 만들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동유럽 전역을 게르만화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문화예술이 사라지고 역사가 없어지면 폴란드는 영원히 독일의 식민지가 될 것이다.”

독일 나치는 바르샤바 등 폴란드 도시를 게르만화하기 위해 먼저 문화예술을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폴란드 국민의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 미술품을 모두 소각하거나 부수기로 했다.

그들이 특히 신경 쓴 작품은 과거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긴 역사를 담은 얀 마테이코(1838~93년)의 그림 두 점이었다. 바로 ‘그른바르드의 전쟁’과 ‘프로이센의 경의’였다.

얀 마테이코는 폴란드의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국민화가였다. ‘그른바르드의 전투’는 1410년 폴란드 그른바르드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과 프로이센-독일기사단(튜턴 기사단) 사이의 전투였다. 연합군 측에서 5000명이 죽었고, 프로이센-독일기사단 측에서는 8000명이 사망하고 1만 3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슬라브족은 유럽의 중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폴란드는 1519~21년 독일기사단과 다시 전쟁을 벌였다. 폴란드는 여기서도 승리를 거뒀다. 지기스문트 1세 국왕은 프로이센의 알브레흐트 호헨졸렌 대공에게 대공 작위를 내렸다. 알브레흐트는 크라쿠프를 방문해 지기스문트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무릎을 꿇었다. ‘프로이센의 경의’는 알브레흐트 대공이 1525년 폴란드 크라쿠프 시장광장에서 지기스문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얀 마테이코가 살던 시대의 폴란드는 100년 이상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폴란드 국민은 여러 차례 항거했지만 그때마다 세 나라에 의해 유혈 진압됐다. 한때 중부유럽을 호령했던 폴란드라는 나라는 당시에는 지도에 이름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얀 마테이코의 두 그림은 많은 폴란드 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가슴 깊이 숨겨졌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 나치의 주역인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직전인 1939년 8월 크라쿠프를 방문했다. 그는 크라쿠프 국립미술관에서 우연히 ‘프로이센의 경의’을 봤다. 그는 국립미술관 관장인 펠릭스 코페라 관장에게서 그림 내용을 전해 들었다. 지독한 수치심을 느낀 그는 반드시 그림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괴링의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폴란드 국민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모든 작품을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 특히 얀 마테이코의 두 그림은 반드시 태워버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림을 둘러싼 숨바꼭질

독일군은 9월 1일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에 무차별 공중 폭격을 퍼부음으로써 폴란드 침공전쟁을 시작했다.

바르샤바 국립미술관은 9월 7일 ‘그른바르드의 전투’를 숨기기로 했다. 젊은 화가 스타니스와프 에스몬드 등이 그림을 마차에 싣고 바르샤바 남쪽의 소도시 루블린으로 갔다. 그들은 루블린 미술관에 그림을 숨겼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그른바르드의 전투’를 찾기 위해 바르샤바 곳곳을 수색했다. 그림이 루블린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독일군은 루블린에도 몰려갔다. 루블린 미술관을 독일군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몰수하기로 했다. 독일군 장교들이 사무실 이전을 준비하기 위해 미술관에 찾아갔다. 미술관 전시실에 ‘그른바르드의 전투’가 버젓이 걸려 있었지만 그들 중에 그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루블린 미술관 측은 두려워졌다. 그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른바르드의 전투’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림이 너무 크고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세로 426cm, 가로 987cm에 무게 1.5t이나 됐다. 가방에 넣어 옮길 수는 없었다.

루블린 미술관 측은 계략을 꾸몄다. 우선 미술관 담장을 허물어 보수를 하는 것처럼 꾸몄다. 벽돌 등을 실은 마차가 연일 미술관을 오갔다. 미술관에 상주한 독일군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루블린 미술관 측은 며칠 후 집기를 옮기는 것처럼 꾸며 ‘그른바르드의 전투’를 마차에 실어 인근의 시청 교통국으로 옮겼다. 여전히 독일군은 의심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그림을 빼내 인근으로 옮기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루블린 미술관 측은 교통국 마당을 파서 ‘그른바르드의 전투’를 묻었다. 그림은 전쟁이 끝나고 독일군이 물러날 때까지 그곳에 묻혀 있었다.

크라쿠프 국립미술관도 독일군이 쳐들어오기 전 ‘프로이센의 경의’를 크라쿠프 동쪽의 자모스크로 옮겨 성 카트린 교회의 지하묘지에 숨겼다. 교회 목사인 바츠와프 스타니스츠베프스키 등이 그림을 보호하는 일을 맡았다.

크라쿠프 국립미술관 코페라 관장은 며칠 뒤 성 카트린 교회 목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독일군이 자모스크와 성 카트린 교회를 수색하고 다닙니다. 머지않아 발각될 우려가 큽니다.”

고민한 코페라 관장은 ‘프로이센의 경의’를 다시 크라쿠프로 가져오기로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전략을 쓰기로 한 것이다.

코페라 관장은 자모스크 시장인 미카우 바조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독일군에게서 물품 판매를 위한 여행 허가서를 받았다. 시장은 각종 생필품을 가득 실은 마차에 그림을 숨겼다.

‘프로이센의 경의’는 독일군에게 들키지 않고 크라쿠프로 돌아갔다. 그림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산업박물관, 크차프스키 미술관 등을 계속 돌아다녔다. 모두 독일군이 지키는 시설이었다. 그림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프로이센의 경의’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독일군에 저항하는 폴란드 지하조직은 두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그림을 잃어버렸다’ ‘실수로 그림을 찢어 태워버렸다’는 등의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영국 런던에 피신한 일부 저항세력은 라디오 방송에서 “두 그림을 영국에 갖고 왔다”고 엉터리 보도를 내보냈다.

두 그림을 찾으려는 독일군의 노력은 더 뜨거워졌다. 독일군은 당근과 채찍 양면 정책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그림 소재지를 알려주는 사람에게 현상금 200만 마르크를 주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1000만 마르크로 올렸다. 독일 시민권과 여권을 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그런데도 신고하는 폴란드 국민은 한 명도 없었다.

 

 

화가 난 독일군은 그림의 행방을 알 만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모두 체포해 고문하거나 죽여 버렸다. 바르샤바의 미술 관계자들은 루블린 성에서 총살당하거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가스에 질식해 죽었다. 바르샤바 국립미술관 직원들도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크라쿠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성 카트린 교회 목사 등 주요 인사를 사살하거나 독일 뮌헨의 다차우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수용소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림의 소재지를 발설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9년 폴란드 정부는 두 그림을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에 다시 걸었다. 지금 바르샤바 국립박물관과 크라쿠프 수키엔니체 미술관에 가면 ‘그른바르드의 전투’ 와 ‘프로이센의 경의’를 볼 수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