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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쇼팽 박물관 지하에는 아직도 황금오리가 살까?

[유럽 인문학 기행-폴란드] 쇼팽 박물관의 황금오리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선술집은 여느 날처럼 젊은이들로 흥청거렸다. 다들 상당히 취했는데도 술을 더 마시려는 듯 손에는 큰 술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다들 쓸데없는 이야기를 왁자지껄하게 나누고 있을 때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모두 무척 반가운 듯 그의 등을 두들기며 선술집 한가운데로 끌어당겼다.

 

 

“어서 오게.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텐가?”

 

뒤늦게 선술집에 들어선 젊은이는 야코프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못한 그는 직업도 없었다. 늘 돈이 없어 하루 세끼 밥을 챙겨 먹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성당의 쥐만큼 가난한 녀석”이라고 놀리곤 했다.

 

야코프에게는 딱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일어나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는 죄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듣고 오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들보다 더 빨리 알고, 더 자세히 알고, 더 재미있게 이야기한다는 평을 들었다.

야코프는 하루 종일 쫄쫄 굶다가 저녁이 되면 선술집에 가서 술 취한 사람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한두 개 들려주고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오스트로스키 궁전의 황금오리

어느 추운 날이었다. 야코프는 다른 날처럼 선술집에서 취객에게 이야기 몇 자락을 들려주고 얻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처음 보는 노인이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야코프는 음식을 입으로 쑤셔 넣으면서도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구시가지 인근에 궁전이 하나 있지. 다들 알 거야. 오스트로스키 궁전 말일세. 궁전 지하 창고에 들어가면 미로로 가는 길이 나온다네. 미로에서 헤매지 않고 끝까지 방향을 잘 찾아 가면 동굴이 하나 나오지. 동굴 안에는 아직 어떤 인간도 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빛을 내는 물이 가득 찬 호수가 있어. 호수에는 오리 한 마리가 외롭게 헤엄을 치고 있다는군. 보물 창고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황금오리야. 자네들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오리는 보답으로 보물창고의 열쇠를 줄 걸세. 자, 어때? 다들 구미가 당기지 않나? 오늘 저녁에 궁전 지하로 한 번 들어가 보는 게 어떤가?”

 

이야기를 마친 노인은 주변의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크게 웃었다. 다들 뒤로 꽁지만 슬슬 뺄 뿐 노인에게 어떻게 하면 미로 입구로 갈 수 있는지, 어떤 보물이 있는지, 오리가 무슨 소원을 묻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100%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야코프는 달랐다. 노인이 다른 젊은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들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물찾기를 한 번 시도해 보라고 권유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내가 잃을 게 뭐가 있지? 미로에 가서 헤매다 죽으나, 이렇게 매일 거지처럼 밥이나 얻어먹다 죽으나 다를 게 뭐냔 말이야? 노인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냥 하룻밤 재미있게 논 셈 치면 되고, 사실이라면 팔자를 고치는 거야.’

 

 

야코프는 곧바로 선술집에서 나와 오스트로스키 궁전으로 갔다.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그는 창문 안도 들여다보았다. 다들 잠든 것인지 촛불이 켜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야코프는 궁전의 한쪽 구석에 있는 창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제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쪽에 바닥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고 아래에 미로는 없었다. 꽤 오래 걸어야 하는 좁고 고불고불하고 긴 길이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환한 빛이 보였다. 야코프는 빛을 향해 서둘러 걸었다. 굽은 길을 막 도는 순간 엄청나게 큰 동굴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동굴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굴의 돌이 모두 금이었던 것이다.

동굴 가운데에는 큰 호수가 하나 있었다. 물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이 녹은 것처럼 아주 영롱하게 빛을 발산했다. 호수에서는 오리 한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노인의 말처럼 황금오리였다. 깃털은 모두 황금이었다. 머리에는 많은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한 젊은이여, 이리 가까이 오도록 해요.”

야코프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황금오리가 사람처럼 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황금오리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그토록 원하던 보물을 찾은 거예요다. 여기 있는 보물은 모두 당신 것이랍니다. 한 가지 과제만 수행할 수 있다면….”

“그, 그것이 무엇인가요? 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 시키기만 하십시오.”

“당신에게 금화 100개를 줄게요.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일 하루 동안에 다 써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고 동굴로 다시 돌아온다면 나머지 보물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어요.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금화는 모두 당신을 위해서만 써야 해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명심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쉬운 과제를 주시다니…. 세상에 그런 일을 못 할 바보가 어디 있나요?”

 

■금화 100개를 오직 나를 위해

야코프는 다음 날 황금오리가 금화 100개를 넣어준 가죽주머니를 챙겨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기분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야코프는 먼저 바르샤바에서 가장 비싼 옷감으로 신사복을 만드는 양복점으로 달려갔다. 그는 양복 한 벌과 코트, 바지 한 벌, 셔츠 여러 벌을 주문했다. 값비싼 가죽으로 만든 장난스러운 모자도 하나 맞췄다. 양복점에서 나온 뒤에는 구두점으로 갔다. 멋진 부츠 한 켤레와 구두 두 켤레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멋 부리기를 끝낸 야코프는 늘 음식을 얻어먹기만 했던 구시가지의 선술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아침인데도 많은 젊은이가 술을 마시고 요리를 먹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가볍게 한 잔 걸친 뒤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금화 100개를 다 쓰려면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해선 안 되겠군. 바르샤바에서 가장 비싼 식당에 가야겠어.’

 

 

야코프는 스타레 미아스토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격이 비싼 식당에 들어갔다. 그는 가장 값비싼 술을 여러 병 주문했다. 식당의 최고급 요리를 모두 만들어 가져오라고 했다. 미심찍어하는 지배인 앞에서 주머니를 꺼내 금화를 식탁에 좌르르 쏟았다.

야코프는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어 늘 얻어먹기만 하던 거지였다. 그런 녀석이 귀티가 줄줄 흐르는 양복과 셔츠를 입고 귀족이나 신는 구두를 신고 온 것만 해도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수십 개나 되는 금화를 장난처럼 쏟아내다니…!

지배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코프는 지배인에게 2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화 두 개를 팁으로 건네며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부탁 하나 합시다. 마차 한 대와 마차를 끌 두 마리를 사서 식당 앞으로 끌고 오도록 해요. 내 이름을 새긴 황금 도장도 하나 만들어서 가져오시오. 일을 제대로 잘 마치면 금화 한 개를 더 팁으로 주도록 할게요.”

지배인에게 심부름을 맡긴 야코프는 이제 무슨 일을 하면서 돈을 쓸지를 궁리했다. 식당 한쪽 벽에 연극 공연이 열린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국왕과 국왕의 외동딸인 공주도 관람한다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야코프는 극장에서 가장 비싼 좌석을 샀다. 국왕과 공주가 앉는 자리 옆이었다. 극장에 간 그는 국왕에게 허리를 깊숙하게 굽혀 인사한 뒤 아주 거만한 자세로 앉았다.

‘내일이면 황금오리의 보물이 다 내 것이 될 거야. 나는 폴란드에서 최고 부자가 되는 것이지. 먼저 오스트로스키 궁전을 사서 개조해야지. 그런 다음에 국왕을 찾아가 공주를 달라고 청혼하는 거야. 마차 두 개에 황금을 가득 싣고 가면 아무리 국왕이라도 놀라면서 승낙하겠지. 나중에는 왕궁을 새로 지어 공주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거야!’

야코프는 연극은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공주와 결혼하는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좌석에 등을 깊숙하게 파묻은 덕에 그가 히죽히죽하는 모습을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는 혼자서 히히덕거리며 즐거워하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야코프가 뒤늦게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연극은 끝난 뒤였다. 국왕은 물론 모든 관객은 극장에서 나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금화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선술집에 가서 술이나 몇 잔 마셔야지. 통 크게 금화 하나를 술값으로 내고 나면 딱 맞겠군. 돈을 쓰는 게 이렇게 쉬운 줄 몰랐군. 이걸 과제라고 내는 황금오리는 정말 어리석은 녀석이야.’

 

■마지막 순간의 자비심

야코프는 마차를 타고 선술집으로 향했다. 선술집 안팎에는 취객이 들끓고 있었다. 그에게 늘 음식을 적선하던 젊은이들도 보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선술집 입구 옆에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거지가 보였다. 곁에는 딸처럼 보이는 어린아이가 아빠의 가슴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야코프가 쳐다보는 것을 눈치 챈 거지는 몸을 일으켜 손을 길게 뻗었다.

“나으리, 벌써 일주일이나 굶었습니다.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어린 것이 얼마나 배고팠으면 죽은 것처럼 이렇게 쓰러져 말도 못 하겠습니까? 빵 한 조각이라도 사 먹을 수 있도록 한 푼만 적선하십시오. 나리에게 영원히 행운만 가득하라고 평생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나으리, 제발….”

야코프는 하루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원래 착하고 동정심이 많았던 그는 마지막 금화를 거지의 깡통에 던지고 말았다. 거지와 딸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남을 위해 금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황금오리의 조건을 까먹고 만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황금오리가 갑자기 야코프 앞에 나타났다.

“거지에게 금화를 던져주다니 당신은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했어요. 당신은 이제 어제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예요. 금화 100개로 산 모든 것은 이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겁니다. 모두 자업자득이지요.”

황금오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야코프 앞에 서 있던 마차와 말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맞춰 입었던 양복, 셔츠, 구두도 모두 사라졌다. 그의 몸에는 누더기 같은 더러운 옷이 다시 걸쳐져 있었다.

야코프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스스로 차버린 행운을 원망하며 통곡했다.

“젊은이, 너무 슬퍼하지 말게. 자네는 아직 젊고, 기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야코프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선술집 앞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가 서 있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전날 밤 선술집에서 젊은이들에게 황금 오리 이야기를 하던 노인이었다.

“보물을 잃었다고 슬퍼하지 말게. 자네는 더 큰 보물을 얻은 것이라네. 자네의 선한 마음이야. 그 마음이 욕심을 이겨내지 않았나? 진정한 보물은 황금이 아니라 선량한 영혼이지. 그리고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일세.”

야코프는 노인의 말 중에서 틀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보물은 원래부터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경을 써서 돈을 쓴다 하더라도 결국 금화 100개를 자신만 위해서 쓸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코프는 다음날 제화점을 찾아갔다. 열심히 일할 테니 점원으로 채용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직원 한 명이 그만둔 터여서 주인은 새 직원을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코프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무도 몰랐던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다. 거기에 훌륭한 말솜씨도 있었다.

불과 2~3년 만에 야코프는 바르샤바에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 제화공이 됐다. 바르샤바 귀족 중에서 그가 만든 구두나 부츠를 신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야코프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국왕 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공주는 그에게 가죽 슬리퍼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쓰지 않는다. 모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제화공 야코프와 황금오리의 전설은 바르샤바에 널리 퍼졌다. 오스트로스키 궁전의 주인은 정원 분수에 황금오리 조각을 만들어 세웠다. 세월이 더 흐르자 오스트로스키 궁전은 없어지고, 대신 폴란드가 자랑하는 유명한 음악인을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다. 바로 ‘프레데릭 쇼팽 박물관’이다. 지금도 박물관에 가면 황금오리 조각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만들었던 바로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