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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이영철의 제주여행]박해 속에서도 신앙으로 일궈낸 자기희생의 삶

(11) 한양할머니 정난주마리아 上
신유박해로 제주 유배 온 정난주
갓난 아들 노비 운명 물려받을까
추자도에 남겨두고 죄책감 살아
모진 일상 속에도 이웃 도우며
끝내 칭송받는 고결한 노년 맞이

 

1801년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 최초의 대대적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임금이 죽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와 새 집권세력 노론벽파가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조선 땅에 피바람이 불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교인 100여 명이 처형되었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다산 정약용의 집안까지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다산의 작은형 정약종은 사건 초기 붙잡혀 처형되었고, 큰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의 조카 정난주(본명 명련)는 남편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대역죄인의 가족이 되어 두 살 난 아들을 안고 시어머니와 함께 유배길에 올랐다. 한양에서부터 압송되어 내려오다 남도 갈림길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헤어졌다. 한쪽은 거제도, 한쪽은 제주도가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 보자고 울며 다짐했지만 희망 없는 기약임은 두 여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제주 가는 바닷길 중간 기착지인 추자도에 하룻밤 머물면서 난주는 두 살 아기를 바닷가 갯바위 위에 몰래 버렸다. 포교에겐 아기가 숨이 끊어져 바다에 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살아나든 아니면 갯바위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든 그건 아가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다만, 아들은 자신처럼 노비로 살게 하고 싶진 않았고, 노비 어미의 구차한 모습을 보면서 크게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후 추자섬에서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은 제주에서 노비로 살았던 그녀의 평생을 지배했다.

정난주에 대한 제주에서의 삶의 기록은 많지 않다.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 신앙인으로서의 자료들이 성당 차원에서 모아져 있거나,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일관해온 일생의 모습들이 이웃과 주변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올 뿐이다.

2018년 가을에 발간된 김소윤 작가의 소설 ‘난주’는 신앙인이 아닌 자연인으로서 한 여인의 삶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명문 집안의 큰딸에서 하루아침에 천민 노비의 신분으로 추락한 그녀의 일상을 소설 ‘난주’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동녘에서 치솟은 붉은 해를 따라 하루가 이어지고 다시 또 서녘으로 하루를 끌고 가며 많은 날들이 흘렀다. 난주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일 년 만에 뼛속까지 노비가 된 듯했고, 때로는 매를 맞고 때로는 호통을 들었다. 그악스럽게 난주를 몰아세우는 것은 나라님도 법률도 아니요, 눈을 뜨면 맞이하는 바로 그 현실이었다.’

온갖 잡일에 험한 막노동까지 겸해야 하는 노비의 일상에 대역죄인의 가족,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의 무리라는 매서운 눈초리가 그녀에게 덧붙여졌다.

제주로 유배 올 당시 정난주는 29세였다. 17세에 황사영과 혼인했으니 부부로서의 행복은 10여 년이었다. 소설 ‘난주’에 그려지는 10대 부부의 혼인 모습은 이후의 비극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마당에 펼쳐진 열 폭 병풍 앞으로 어른들은 근엄한 얼굴로 서 있고, 화려한 초례상을 둘러싼 사람들의 속삭임과 웃음소리는 아름다운 선율처럼 부드러웠다. 난주가 다홍색 치마에 활옷을 차려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떼었을 때, 제 앞에 마주하고 선 소년의 긴장된 얼굴이 훤하게 빛났다. 정갈하고 맑은 그 얼굴은 캄캄한 밤을 빛내는 우아한 별처럼 단숨에 난주를 사로잡았다. 옥처럼 희고 순결한 기대가 버선발마다 바삭거렸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지는 떨림이 온몸에 퍼졌다. 다가올 재앙은 조금도 직감할 수 없었다. 어린 부부는 떨어지는 햇살이었고 부서지는 빛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짧은 세월은 한결같이 그랬다. 쌀을 일어 밥을 안치고 나물을 다듬고 반찬을 해서 상을 차리던 숱한 끼니의 일상들. 서방님의 빨래가 바람에 너풀너풀 말라가는 것만 보아도 두방망이질 치던 맹목적인 순정과 연모의 나날들…’

제주로 향하는 유배길에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는 대목이다.
 

 

그녀는 제주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관의 노비로 살았다. 늘 죽음과 가까웠던 모진 일상이었지만 신앙과 인내로 이겨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마당에 불우한 아이들을 데려다 양녀와 양자로 삼아 키우기도 하였다. 전염병으로 마을이 공포에 빠질 땐 전에 읽었던 의학 지식으로 혼란을 진정시키고 자기 몸 돌보지 않으며 병자들을 간병하기도 했다. 학식과 지혜에 속 깊은 덕망까지 갖췄기에 결국엔 이웃과 주변 모두로부터 칭송받는 고결한 노년을 살았다. 자기희생과 헌신의 삶이었다. 66세에 병으로 눈을 감을 때에는 이웃과 주변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양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난주는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묻혀 있다. 신평리와 보성리 경계지역에 있는 천주교 대정성지 안이다. 올레 11코스를 걸어 모슬봉에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에는 상모리 공동묘지, 대정읍 공설묘지, 칠성 공동묘지 등 유독 공동묘지를 많이 만난다. 모슬봉을 내려와 밭과 밭 사이 돌담길을 걷다 보면 커다란 나무 십자가와 성모상이 얼른 눈에 들어오는 모슬포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고, 잠시 후 대정성지 내 정난주마리아 묘 앞에 이른다. 넓은 공터 한 켠에 규모를 갖추고 정성을 쏟아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 묘역을 연상케 한다.

제주에는 모두 6개의 천주교 성지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이들 중 하나인 ‘정난주 길’은 정난주 묘에서 출발해 대정향교와 알뜨르 비행장을 거쳐 모슬포성당까지 이어지는 7㎞ 구간이다. 올레 10코스, 11코스와 부분적으로 겹친다.

추자도에 있는 올레 18-1코스에는 정난주가 두고 온 아들 황경한의 묘가 있다. 추자도 바닷가에 버려진 2세 아가는 29세 어미의 소원대로 다행히 좋은 사람에게 발견되어 평범한 백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아들은 제주에 노비로 산다는 모친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정난주 또한 추자에 사는 성인 아들의 존재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능지처참된 대역죄인의 아내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자는 평생 대면할 수 없었고 각자의 섬에서 생을 마쳤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