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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스님도 해녀도 항일운동 앞장섰다

(130) 제주 항일운동 약사
불교계 주도 법정사 항일운동
3·1 운동 이전 최대 단일투쟁
민족의식 일깨운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여성 중심 항거
대정현, 제주 의병항쟁 발상지

 

한라산 남쪽 심산유곡에 위치한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를 설문대어린이도서관(관장 강영미) 제주 역사문화 답사팀과 함께 다시 찾았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 답사와 사당인 의열사 참배는 물론, 주변에 있는 하원 수로길과 한라산 둘레길 일부도 한나절 걸려 탐사하였다.

그 먼 길을 버스로 오가며 제주에서의 항일운동의 약사를 공유한 참가자들은, 무오법정사 터로 가는 길이 비경과 비사가 깃든 여행이라며 지인들과 다시 찾겠다는 의지도 들려주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보다도 5개월 앞선 1918년(무오년) 10월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이 전국에서도 제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음이 최근 여러 경로로 알려지고 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은 강창규 스님 등의 여러 제주선인들과 함께 본토에서 건너온 김연일 등의 여러 선각자에 의해 ‘한라에서 백두로’ 확산되기를 소망하며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마침 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질토래비에서는 ‘대정현 동녘 역사문화 깃든 길’의 첫 기행지인 무오법정사 관련 연재에 앞서,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약사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제주에서는 곧잘 3대 항일운동으로 다음과 같이 회자되고 있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1918년(무오년) 불교계를 중심으로 선도교의 교도들과 지역주민 등 700여 명이 10월 6일과 7일 양일간 일제의 중문주재소를 공격, 방화해 전소시킨 사건이다.

이는 3·1운동 이전에 일어난 최대 규모의 단일투쟁으로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제주도민의 항일투쟁이자 국권회복운동이다.
 

 

▲조천만세운동=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조천면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1차는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2~4차는 군중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천장터를 이용하여 항일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제주도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커다란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녀항일운동=구좌면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우도 등의 해녀들을 중심으로 해녀들의 생존권을 침탈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항거한 여성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자,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이다.

해녀항일운동은 총 23회에 걸쳐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일제의 식민지 약탈정책에 저항한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여성시위문화의 정수이다.

질토래비에서는 위의 제주 3대 항일운동에 더하여 제주에서의 의병항쟁을 ‘제주에서의 4대 항일운동’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제주에서의 항일운동의 견인은 1909년 의병항쟁이고 그 선봉장은 고승천 김만석 김석윤 노상옥 등이다. 일제는 항일운동을 앞장서 이끈 의병장 고사훈과 의병 김만석이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자 그들을 총살형에 처했다.

역사문화는 결과 못지않게 과정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가져온 데는 첫걸음이 더욱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듯,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린 것은 의병항쟁이기에 우선 제주에서의 의병항쟁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대정현(군)에서 시작된 의병항쟁=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는,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조선 통감부를 설치하여, 1906년 재판소 판사를 겸직하던 종전의 제주목사 제도를 없애고 행정만을 떠맡는 군수제로 바꿨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조종환 목사를 끝으로 1906년 10월 윤원구 군수가 제주에 부임했다.

일제의 조선 통감부는 1907년 제주에 우체국과 관세서를,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일본인을 임명하고 대정·정의·서귀포에 경찰분파소를 설치했다.

윤원구 군수는 ‘통신과 재정을 장악당하고 치안과 재판권까지 박탈당하였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며 1908년 말 군수직을 사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2월 25일 제주의 유림 고사훈(의병장이 되면서 승천으로 개명)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김만석 조병생 김재돌 양남석 양만평 한영근 등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발의하여 의병장에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을 추대하고, 3월 3일 제주성에 입성하여 관덕정에 모여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제주 전역에선 갖가지 풍문들이 돌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에 와 있는 왜놈들을 의병들이 모조리 때려죽인다, 육지에서 의병 60명이 협재리로 상륙하여 이미 제주의병과 합세하였다, 제주읍성 밖 광양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이 있으며, 삼읍의 장정들이 식량을 걸머지고 속속 제주읍성으로 집결하고 있다.’

실제로 창의소와 무기를 제작하는 대장간이 있었던 광양에는 흉흉한 민심을 듣고 피난 떠난 이들로 집들이 많이 비어 있기도 했다 한다.
 

 

 

▲일제에 의해 처형된 의병장 고승천=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자 본토에서는 최익현(1873년 제주에 유배됨)과 신돌석 등이 주도하는 의병활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전해들은 고사훈(승천)은 그들과 같이할 것을 결의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갔다. 이후 의병장에 추대된 고승천은 조병생·김만석·김재돌·양남석 등과 더불어 2월 25일 대정군 영락리 심평리 안성리 광청리 등지에서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으기도 했다. 의병 병력 동원을 대정현(이후 대정군)에서 시작한 것은 강제검의 난(1862), 방성칠의 난(1898), 이재수의 난(1901) 등의 여러 민란이 대정현에서 항쟁의지가 결집되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대정군수 김종하는 인근 마을 장정들을 징발하여 주야 교대로 의병들의 항거에 대비하였다. 대정경찰관 분파소에서는 2월 28일 밤 인근 마을 장정들을 동원하여 의병들이 집결한 동광청리를 기습 공격하고, 민가에 머물던 의병장 고승천과 의병 김만석을 체포하였다. 일경은 고승천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고 일제에 협력한다면 높은 관직에 나갈 수 있다고 회유하였다. 이에 고승천은‘위기에 처한 나라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함은 국민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지금 나는 구차하게 너희들 감언이설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따름이다.’라고 응수하였다. 일제는 3월 4일 아침 탈출 시도하던 고승천과 김만석을 대정읍성 밖 안성리 돌동산에서 총살하였다. 고승천이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자, 형제가 가매장한 곳에서 시체를 거두어 제주면 영평 동남쪽 두곡(杜谷)에 안장하였다. 유가족으로는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제주시에서는 1997년 동광양에서 연북로로 이어지는 700여 미터의 대로를 ‘승천로’로 명명하여 의병장 고승천의 얼을 기리고 있다.

다음은 동시대 석학인 심재 김석익이 고승천의 죽음을 읊은 ‘억고초광경지(憶高樵㹰景志:초광은 호, 경지는 자임)’라는 한시를 번역한 글이다.

‘공의 굳은 성품은 이 세상에 비할 자 없어 /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영원히 살아남아 / 우리 샘 아래로 솟구치며 흐르리라.’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