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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도망치듯 돌아온 고향에서 얻은 치유와 성장

(40)리틀 포레스트
대학 진학 위해 도시 상경한 주인공…아르바이트·취업 준비로 성장통 겪어
잠시 쉬어 가고자 내려온 시골서 소소한 일상 보내며 생기·평온 되찾아

 

온 세상이 하얗던 겨울날, 흰 눈 사각사각 밟으며 집으로 왔다. 읍내 역에 내려 집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버스는 하루 몇 번 없고, 취업도 못한 백수 주제에 콜택시는 사치였다.

마당 넓은 시골 외딴집은 지난 방학 때 잠시 다녀간 흔적 그대로다. 창고에 남아있던 땔감으로 난로에 불 붙이니, 얼었던 몸이 금세 사르르 녹는다. 마루와 방 먼지 대충 걷어내고 재래식 난로 앞에 주저앉았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에 닿은 기분이다.

나른하게 졸려오지만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열차 타기 전 편의점 김밥 하나 먹은 게 오늘 끼니 전부다. 아점으로 점심 거르는 일상이야 다반사라 익숙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달동네 자취집에서 짐 싸 들고 출발해 서울역 거쳐 지금까지 긴긴 하루였다. 어두워진 뒤뜰에 나가 양배추 한 포기와 파 한쪽을 찾아냈다. 눈밭 속에서 눈 알갱이 흠뻑 묻히고 나온 배춧잎은 아삭아삭 싱싱했다. 좀 전에 안친 돌솥에선, 쌀독 바닥을 박박 긁어낸 쌀 한 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밥 한 공기는 넉넉하겠다. 냄비 속에선 배추 듬뿍에 파 몇 조각 들어간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다.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 비우고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서울에 있었으면 바람 들어오는 2층 자취방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 저녁 때우고 있을 시간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든다. 엄마가 다녀간 흔적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역시나 집에 오길 잘했다.
 

 

미성리는 쌀과 사과가 유명한 작고 외진 시골 마을이다. 혜원이 네 살 때 세 식구는 아빠의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왔다. 병든 아빠의 요양 때문이었지만, 아빠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엄마는 왠지 도시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학교까지 등하굣길도 멀어 지긋지긋했던 혜원은 공부 열심히 해서 시골을 벗어나려 했지만, 정작 엄마가 먼저 떠났다. 혜원의 수능이 끝나고 어느 날 엄마는 편지 한 통 남기고 혼자 훌쩍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얼마 후 합격 통지 받은 혜원도 혼자 서울로 가 어렵게 대학 4년을 마쳤다. 엄마가 두고 간 통장 잔고는 등록금에 2년 학비 정도였으니, 내내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던 혜원의 학업 생활은 줄곧 험난했다.

차분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여유 없었고, 인스턴트로 때우는 매 끼니는 먹어도 먹어도 늘 허기가 졌다. 알바로 맞이하는 손님들 앞에선 영혼마저 내려놔야만 했다. 졸업은 했지만 취업도 안 되고 여전히 알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얼마 전 본 교사 임용고시에 남친은 붙고, 혜원은 떨어졌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우선은 살고 보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도망치듯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그렇다고 시골에 눌러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혼자 숨어 있을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고향에선 소꿉친구 재하와 은숙이 혜원을 반긴다.

서울로 대학 갔으나 취업도 연애도 다 실패해 낙향한 듯 보이는 혜원에게 고향은 따뜻했다. 두 친구가 틈만 나면 놀러 오니 외로울 틈이 없었고, 음식 바리바리 싸주는 고모 집도 가까웠다. 이웃집 아저씨가 키우라며 놓고 간 암탉에게선 매일매일 따뜻한 계란도 몇 개씩 생겨난다. 도끼로 장작 패 땔감 만드는 일도 몇 번 해보니 익숙해졌고, 뒤뜰로 밭으로 뒷산으로 몸만 조금 움직이면 배추나 밤이나 양파 등 자연 속에 숨 쉬고 있던 온갖 것들이 싱싱한 먹을거리다.
 

 

김밥 한 줄, 우유 한 병에도 마음 졸이며 주머니 사정을 의식해야 했던 서울 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마음 편하고 풍요로운 나날이다.

배추전에 수제비, 시루떡 케이크, 꽃 파스타, 양배추 빈대떡, 감자떡, 아카시아와 쑥갓 튀김, 갓 따낸 토마토, 오이콩국수, 집에서 만든 막걸리, 양파 통구이, 밤 조림…, 하나같이 손과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인 먹거리들은 혜원의 온몸을 다시 생기로 차오르게 해줬다.

봄나물과 고사리를 캐 한 바구니 듬뿍 담다 보니, ‘날 풀리면 올라가리라’던 마음은 어느덧 ‘겨울만 보내고 가기엔 아깝지’로 바뀐다. 봄의 정령들로 가득 차오른 대지에 은혜는 감자도 심고 고추도 심는다. 다음 계절까지도 기약하는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많이 알려진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 주변 청춘들의 안타까운 성장통을 다루지만 세대 불문, 잠시 쉬어 가고 싶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힘든 길을 달려왔거나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잔잔한 힐링영화라고 할까.

‘굿바이 미스터 션샤인, 독립된 조국에서 씨유 어게인!’이라고 읊조리며 2018년 한 종편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했던 배우 김태리의 또 다른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등장 빈도는 낮았지만 명배우 문소리의 엄마 역할도 영화 내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향에 돌아와 온전하게 사계절을 보낸 혜원은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엄마의 예전 편지글을 되새겨본다.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 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혜원에 대한 사랑이 그녀만의 ‘작은 숲,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였던 것이다. 이제 혜원도 자신만의 작은 숲을 찾을 거라고 뇌까리지만, 관객의 눈에는 이미 그녀 안에 풍성해진 나무 숲이 보인다. 지난 겨울 집에 왔을 때의 그 황량했던 표정과는 달리, 여유롭고 평온해진 모습이다. 사계절 동안 그녀의 내면에 온전한 치유와 성장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제 코로나도 조금은 풀린 듯하다. 다시 새로운 시절이 열렸다. 어딘가로 떠나보자. 사계절이 아니고 한 계절이면 어떤가? 한 달 또는 일주일 살아보기도 좋겠다. 익숙했던 일상을 잠시라도 벗어난다면 우리 안에 각자의 작은 숲이 소담스럽게 자랄 것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