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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인문학기행] 다뉴브 강은 신발 잃은 유대인을 기억하고 있을까?

[유럽 인문학 기행-헝가리] 다뉴브 강변의 신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체인 다리에서 다뉴브 강을 따라 국회의사당 쪽으로 걸어 가다보면 특이한 풍경이 눈에 띈다. 쇠로 만든 신발 여러 켤레가 강변에 놓였다. 누가 왜 여기에 신발을 벗어 둔 것일까?


사람들은 이 신발을 ‘다뉴브 강변의 신발’이라고 부른다. 터키 출신 영화감독 칸 토카이가 홀로코스트기념관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고, 헝가리 출신 조각가 귤라 파워가 만든 것이다. 신발은 모두 60켤레다. 노동자의 작업화, 회사원의 구두, 여자의 하이힐, 어린이의 운동화 등 종류는 다양하다. 신발 주변에는 영어, 헝가리어, 히브리어로 쓴 안내판이 있다.


‘1944~45년 민병대 ‘화살십자가당’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며 2005년 4월 16일 건설하다’


‘다뉴브 강변의 신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던 1944년 12월~1945년 1월 사이에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 학살극을 잊지 말자며 만든 시설이다. 당시 거의 매일, 하루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유대인이 줄에 묶인 채 끌려가 총살형을 당해 강물에 떠내려갔다. 다뉴브 강변에서 총살당한 유대인은 1만~1만 5000여 명에 이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다뉴브 강변의 신발

 

194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오후였다. 부다페스트에는 하얀 첫눈이 내렸다. 다뉴브 강변에도 눈이 조금씩 쌓였다. 희한하게도 강변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인데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는 밖에 나와 뛰어노는 게 당연한 어린이들도 웬일인지 하나도 없었다. 악마의 숨결처럼 차가운 바람만 강변을 떠돌았다. 강물은 그런 바람이 싫다는 듯 아주 무심하게 서둘러 흘러갔다.

 

낡은 옷을 입고 초췌해 보이는 사람 수십여 명이 줄을 지어 둑을 넘어 강변으로 걸어왔다. 모두 허리와 손에 줄이 묶여 있었다. 게토에서 끌려나온 유대인들이었다. 맨 앞과 맨 뒤에는 총을 든 사내 여러 명이 보였다. 뒤에 따라오는 사내는 큰 보자기를 하나 들고 있었다.

 

“모두 그 자리에 서. 강을 등지고 우리를 바라보도록 해. 그리고 다들 신발을 벗어 그 자리에 두도록.”

 

총을 든 사내가 줄에 묶인 사람들은 다뉴브 강 앞에 나란히 서라고 했다. 그의 얼굴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살기가 가득했다. 옷 이곳저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엉~엉~. 제발 살려주세요. 이제 전쟁도 다 끝나가는데 굳이 우리를 죽일 필요가 있나요?”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 앞에 나란히 선 유대인 사이에서 일제히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인에서부터 중년의 여성, 젊은 남자는 물론 이제 대여섯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어린이도 있었다. 한 노인이 사내를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이것 보게, 젊은이. 나는 슈타이너라고 하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러시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탈출하기도 했지. 나야 이제 죽을 때가 됐으니 여한이 없지만, 저 어린 것들과 젊은 사람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나? 제발 이렇게 비네. 저 사람들은 풀어주도록 하게.”

 

슈타이너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피던 담배를 끄고 다른 사내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총을 들고 줄에 묶인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준하듯이 총을 사람들의 머리에 대고 차례대로 쏘기 시작했다.

 

“탕~~~”

 

“탕~~~”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근차근하게 한 명씩 한 명씩 머리를 쏘았다. 수십 명이었지만 모두의 머리에 총을 쏘는 데에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총에 맞은 사람들은 강 쪽으로 떨어졌다. 사내들은 한 명이 넘어지면 줄을 풀어 강에 빠지게 했다. 강변에는 총을 맞고 강에 떨어져 떠내려간 사람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벗은 신발만 남았다.

 

“유대인들이 남긴 신발 중에서 깨끗한 것만 골라 챙겨라. 일부는 당장 암시장에 가서 팔거나, 아니면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돈이 필요할 때 팔면 돼. 하나라도 버리면 안 돼. 오늘 여기 서너 번은 더 와야 하니까 보자기는 굳이 지금 들고 갈 필요는 없을 거야.”

 

사내의 지시를 받은 다른 사내들은 큰 보자기에 신발을 담았다. 그들은 ‘작업’을 모두 마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씩 피고 다시 강둑을 넘어 사라졌다.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붕괴

 

‘다뉴브강변의 신발’이 생기게 된 비극의 발단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독립한 헝가리민주공화국의 카롤리 미할리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도 채 안 돼 1918년 사임한 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연정을 이뤄 집권했다. ‘옛 영토 회복’을 선언한 그들은 나라 이름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으로 바꿨다.

 

“잃어버린 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습니다. 위대한 조상들의 영광을 회복하겠습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유대인 정부’로 불렸다. 두 당의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당수였고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사실상 대통령이었던 쿤 벨라도 마찬가지였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반혁명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그들은 5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370명을 처형했고 587명을 가두었다. 헝가리 야당과 일부 국민의 마음에는 반유대인 정서가 싹텄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지지 청년들을 모아 ‘적군’을 창설했다. 이들은 체코와의 전쟁에서 이겨 옛 영토였던 슬로바키아를 회복했다. 문제는 이때 발생했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헝가리에 복속시키지 않고 슬로바키아소비에트공화국을 새로 만들게 했다. 젊은이들이 피를 흘린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헝가리 영토는 하나도 늘어나지 않은 셈이었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은 헝가리 국익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유럽에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헝가리를 희생양으로 여기는 반민족주의 세력일 뿐입니다.”

 

헝가리 야당과 대다수 국민은 공산당, 사회민주당의 행위에 크게 분개했다. 체코와의 전쟁에서 압승을 거뒀던 적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생겼다.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청년들과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갈등을 빚었다. 공산당, 사회민주당의 무기였던 적군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국민의 반발이 심해졌다. 두 당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지도부는 헝가리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쿤은 헝가리로 달아났고 다른 지도자들은 지하로 숨었다.

 

“저 놈은 유대인이다. 죽여라!”

 

“저 녀석은 공산주의자다. 놓치지 마라!”

 

공산당, 사회민주당 연정이 붕괴되자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두 당의 집권기에 피해를 봤던 야당과 일부 군인은 복수극을 시작했다. 2년 뒤인 1921년 새 정부가 들어서 질서를 잡을 때까지 1000여 명이 학살당했고, 1만 5000여 명이 수감됐다. 학살당한 사람 대다수는 공산당원과 유대인이었다.

 

 

 

 

■반유대주의 극우정당 등장

 

혼란 상태를 진정시키고 정부를 장악한 민족주의자인 호티 미쿨로슈는 경제 회복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 독일 편에 서서 제2차 세계대전에 군대를 보냈다. 이같은 외교 정책이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에서 뿌려진 비극의 씨앗을 피로 얼룩진 ‘끔찍한 꽃’으로 피어나게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헝가리는 1943년 1월 이탈리아 군과 함께 출전한 돈 강 전투에서 소련군에 참패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려 연합군과의 평화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호티가 배신을 꿈꾼다는 사실을 눈치챈 독일은 1944년 3월 헝가리를 점령하고 도야이 도메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독일은 괴뢰정권에 현안을 서둘러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바로 ‘유대인 청소’였다. 당시 헝가리의 유대인 인구는 80여만 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괴뢰정권은 독일의 지시에 따라 헝가리 유대인 44만 명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거기서 살아남은 헝가리 유대인은 극소수였다. 부다페스트에 있던 유대인은 모두 시내의 게토에 가뒀다.

 

헝가리에서 유대인 청소가 진행되는 동안 전쟁터의 상황은 갈수록 독일에 불리해졌다. 1944년 10월 소련군이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압박하면서 헝가리로 밀려왔다. 독일은 다른 지역에 집중하기 위해 헝가리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물러나면서 유대인 청소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화살십자가당에게 맡겼다. 민족주의자인 잘라지 페렝이 1930년대 중반에 ‘헝가리의 나치’를 표방하면서 만든 극우정당이었다. 주요 지지자는 소외받은 군 장교나 병사, 민족주의자, 농민이었다. 이 정당의 강령은 독일의 나치와 매우 비슷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군국주의를 신봉하는데다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잘라지는 전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집권할 수 있는 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독일이 왜 정권을 넘겨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화살십자가당을 지지하는 청년들을 모아 자치경찰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무기도 지원했다.

“독일은 물러갔지만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부다페스트를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 우리의 땅에 사는 더러운 유대인을 모두 없애는 게 너희들의 임무다. 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모두 사살하도록 하라.”

 

그때부터 화살십자가당에 의한 유대인 대 학살극이 시작됐다. 소련군이 1945년 2월 초 부다페스트를 점령할 때까지 불과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이 학살한 유대인은 다뉴브 강변에서 죽은 1만~1만 5000여 명을 포함해 무려 3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병원에 누워 있는 노인은 물론 게토에 갇혀 사는 주민, 거리에서 표식을 달고 다니는 사람 등 눈에 띄기만 하면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 중 일부는 다뉴브 강에 끌려가 죽었다. 당시 강변에서 벌어진 학살을 목격한 한 헝가리인은 끔찍한 기록을 남겼다.

 

‘펑펑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련군이 들어왔나, 라고 생각했다. 몸을 숙이고 눈만 빼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에서 최악의 장면이 다뉴브 강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치경찰 두 명이 강둑에서 남자, 여자, 어린이를 겨눠 총을 쏘고 있었다. 한 명씩 한 명씩….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쿵거렸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숨죽여 통곡했다.’

 

잘라지는 학살 명령을 내린 직후 헝가리 초대국왕 이슈트반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왕관을 들고 시골로 달아났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붙잡혀 전범 재판에 회부됐고, 유대인 학살 혐의에 유죄를 인정받아 사형을 당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