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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르네상스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프랑스 앙부아즈에 묻히다

[유럽 인문학 기행-프랑스] 앙부아즈 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는 단연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다. 그는 피렌체 지역의 작은 도시 빈치에서 태어났다. 다빈치라는 이름은 ‘빈치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는 피렌체, 밀라노, 로마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낳았다.

 

그렇다면 다빈치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미켈란젤로처럼 피렌체에 묻혔을까? 라파엘로처럼 로마에 안식처를 얻었을까? 뜻밖에 그의 무덤이 프랑스 파리 외곽 앙부아즈에 마련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국을 떠난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누구나 다 알다시피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였다. 그는 67년 동안 살면서 미학자이자 실용적 기술자로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실용적 작품 중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혁신적이고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예술 활동에 매진해 왔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3~16년에는 로마 바티칸의 벨베데레 궁전과 교황 거주지인 ‘팔라티눔 아포스톨리쿰’ 등을 오가며 살았다.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교황 레오 10세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달 금화 33듀캇을 급료로 받았다.

 

레오 10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주제를 내지도 않고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막상 작품 제작에 착수하려고 준비하면 짜증을 내며 취소시키곤 했다. 레오나르도는 인체를 해부해 연구한 뒤 성대에 관한 논문을 써서 교황에게 제출했다. 잃어버린 호의를 되찾으려는 생각에서였지만, 교황은 논문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바람에 다빈치는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몰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충이 이어지던 1515년 유럽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와 피사를 점령하고 피렌체까지 공격했다. 그는 레오10세를 볼로냐로 불러 정전 회담을 열기로 했다. 마침 이 자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참석했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를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레오 10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는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레오나르도 선생, 아무리 고국이라도 굳이 이탈리아에 매여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프랑스로 오십시오. 제가 선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예술 활동에 매달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프랑스에 오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풍부했던 프랑수아 1세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그는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64세이던 1516년 몇몇 제자와 함께 바티칸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먼 이국으로 달려간 예술가에게 프랑수아 1세가 부여한 직책은 ‘왕의 제1 궁정화가이자 기술자, 건축가’였다. 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금화 총 10만 스쿠디를 연금으로 지급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가 넉넉하게 쓰고도 흘러넘칠 만한 금액이었다.

 

 

■프랑스 국왕의 환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부아즈에 있는 클로 뤼세에 거처를 정했다. 클로 뤼세에 있는 침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왕이 살던 앙부아즈 성이 보였다. 프랑수아 1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궁정과 주변에 있는 여러 생을 자주 오갔는데, 앙부아즈 성은 그가 가장 즐겨 머물렀던 곳이다. 성 아래로는 루아르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고, 성채에는 늘 중세 시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 다 오레노, 살라이, 프란세스코 멜치 등 여러 제자를 클로 뤼세로 부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모나리자’와 ‘세례자 요한’ 같은 대작들도 가지고 갔다.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이전만큼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프랑스에 건너간 지 1년여 만인 1517년 오른팔 마비 증세를 보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모나리자’가 미완성 상태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수아 1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시로 클로 뤼세를 찾아가 밤새 레오나르도와 재미있는 담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신 공학, 건축 같은 분야에서는 계속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프랑수아 1세로부터 로모란틴에 지을 새 성의 설계도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레오나르도는 1517년 새 성은 물론 분수를 갖춘 아름다운 정원, 복잡한 구조의 운하를 설계했다. 아쉽게도 새 성은 완공되지 못했다. 그가 만든 설계도는 샹부르 성과 블로아 성 같은 곳에서 발견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왕을 위해 움직이는 사자 인형도 만들어 주었다. 이벤트 기획자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1518년 6월 19일 앙부아즈에서 열린 로렌초 디 피에트르 데 메디치와 마들렌 데 라 투르 도베르뉴의 결혼식을 직접 기획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앙부아즈 성에 묻히다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9년 4월 23일 유언장을 만들었다. 먼저 앙부아즈 성에 있는 성 플로랑텡 교회에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또 유산을 물려줄 제자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는 그해 5월 2일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전설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이 전설은 이후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유언장 내용에 따라 1519년 8월 12일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20년 뒤 프랑수아 1세는 금 세공인이자 건축가인 벤베누토 셀레니에게 레오나르도를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이 세상에서 레오나르도만큼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림, 건축, 조각에서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성 플로랑탱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지시로 완전히 철거돼 버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세기 정도가 지난 1863년 옛 성 플로랑탱 교회 터에서 레오나르도의 유해로 추정되는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작가이자 지방 박물관 감사관이었던 알센 우세가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따라 앙부아즈 성의 옛 플로랑탱 교회 부지에서 유해 수색 작업을 벌인 덕분이었다.

 

우세는 발굴 현장에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큰 두개골과 구리반지를 낀 오른손가락, 하얀색 머리카락, 그리고 ‘EO’ ‘AR’ ‘DUS’ ‘VINC’라고 적힌 돌 조각을 발견했다. 두개골에는 이가 여덟 개 정도 붙어 있었는데, 60대 후반 노인의 치아 상태와 비슷했다. 근처에서 출토된 은 방패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은 프랑수아 1세가 그려져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우세는 반지와 머리카락을 몰래 빼돌린 뒤 두개골과 돌 조각, 은 방패 등을 나폴레옹 3세에게 가져갔다. 유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것이라고 믿은 왕은 1874년 뼈 조각을 앙부아즈 성 안에 있는 성 위베르 예배당으로 옮겼다. 옛 성 플로랑탱 교회 앞에는 레오나르도의 흉상을 세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은 이후 유산은 유언에 따라 여러 제자들에게 나눠졌다. 멜치는 책, 그림 도구와 일부 그림을 물려받았다. 살라이는 밀라노의 저택에 있는 정원 절반을 상속했다. 살라이는 ‘모나리자’ ‘세례자 요한’ 같은 그림 일부를 챙기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수아 1세는 그에게서 ‘모나리자’를 매입해 퐁텐블루 성에 있는 궁전에 보관했다. 이후 루이 16세가 그림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혁명군은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앙부아즈는 루아르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파리에서 기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고속열차로 파리에서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클로 뤼체는 1년 내내 관광객에게 개방된다. 관광객들은 저택뿐만 아니라 그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전시실도 둘러볼 수 있다. 저택에 있는 침실과 식당에는 ‘모나리자’와 ‘세례자 요한’을 베낀 그림이 걸려 이곳이 그의 집이었음을 알려준다.

 

앙부아즈 성도 1년 내내 개방된다. 이곳에서는 당연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묻힌 허버트 예배당과 정원에 있는 레오나르도 흉상을 둘러봐야 한다. 클로 뤼체와 앙부아즈 성을 다 둘러볼 수 있는 복합 표를 사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