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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볼테르 “우리의 침묵이 그의 불행을 만들었다”

[유럽 인문학 기행-프랑스] 팡테옹(2)

언덕에서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1762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스위스 접경지역 페르니에서 살고 있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볼테르는 4년 전 평생 살았던 파리를 떠나 페르니에 이사를 가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평범한 국민들이 기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고통 받는 현실을 목도한 그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손님이 찾아온 것이었다. 낯선 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볼테르 선생님, 제발 칼라스 가족을 도와주십시오.”

 

볼테르는 손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제게 차근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구려.”

 

손님이 차를 마시며 풀어낸 칼라스 가족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칼라스의 억울한 사형

 

1년 전의 일이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필라체 거리에 개신교도인 장 칼라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가족도 모두 개신교 신도였다.

 

칼라스 가족은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인 자리였지만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칼라스가 큰 아들 안토니오와 종교 문제 때문에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힌 게 원인이었다.

 

“정말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하겠니?”

 

“죽도록 공부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변호사 자격증을 받을 수 없답니다. 그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개신교도는 은근히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개신교도는 공무원, 변호사,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도 이런 박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법률 공부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툴루즈 시청에서 변호사 자격증 발급을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개신교도에게는 변호사 자격증을 줄 수 없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받을 수 있지요.”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안토니오는 너무 괴로웠다. 처음에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절대 개종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에 부닥치자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인이 되지 못하면 평생 막일이나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제 앞길을 가로막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안토니오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못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쏟아냈다. 아들의 개종을 말리던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단, 개종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집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안토니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어깨가 축 처진 아들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1층으로 간 안토니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가족이 모여 있는 2층으로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여보, 안토니오를 다시 불러 설득해보세요. 저 아이도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어요.”

 

아내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들은 칼라스는 함께 식사를 하던 아들의 친구와 함께 안토니오를 달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 안토니오! 이게 무슨 짓이냐?”

 

1층으로 내려간 칼라스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깜짝 놀란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이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안토니오가 거실 한쪽 문에 목을 매 자살한 것이었다.

 

“안토니오! 내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이런 일이.”

 

안토니오의 어머니는 대성통곡했다. 다른 형제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인근 주택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창문 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칼라스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를 불렀다. 그는 가톨릭신도였지만 오래 전부터 칼라스 가족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의사가 서둘러 달려왔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들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해 주시면 좋겠군.”

 

칼라스는 아들이 자살했다는 것을 숨겨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의사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망 진단서에 ‘심장마비’라로 적었다.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자살을 치욕으로 여겼다.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칼라스는 눈물을 쏟으며 집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제 아들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랍니다. 이렇게 홀연히 세상을 떠날 줄은 우리도 몰랐습니다.”

 

 

 

신교도의 젊은 아들이 돌연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툴루즈 시청의 관리가 달려왔다. 그는 혹시 타살의 흔적은 없는지 시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안토니오가 칼에 찔리거나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사보고서에 ‘자연사’라고 적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안토니오의 목에 희미한 밧줄 흔적이 보였다. 관리는 그 내용을 기록에는 남기지 않았지만 남몰래 눈여겨보았다.

 

칼라스 가족에게 씻지 못할 슬픔을 안긴 안토니오의 자살은 이렇게 해서 정리가 됐다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안토니오가 자살하고 며칠 뒤였다. 경찰관 여러 명이 칼라스의 집으로 찾아왔다.

 

“칼라스 씨, 당신 아들의 죽음과 관련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군요. 우리랑 잠시 같이 가셔야 되겠습니다.”

 

칼라스는 걱정하는 아내와 아들들을 남겨두고 그들을 따라갔다. 경찰서에는 벌써 그의 이웃들이 와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경찰국장은 그를 독방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 아들의 시체에서 이상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목에 졸린 자국이 있더군요. 어떻게 된 일이죠?”

 

칼라스는 더 이상 아들의 자살을 숨길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다가는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사실 제 아들은 자살했습니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는데 개신교도라서 자격증을 받을 수 없게 됐다며 괴로워했답니다. 개종을 하겠다기에 저와 다투었지요. 그러다 갑자기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목을 맸습니다.”

 

가톨릭신도인 경찰국장은 칼라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믿기 어렵군요. 혹시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고 목 졸라 살해한 것이 아니요?”

 

칼라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같이 식사를 했던 가족과 안토니오의 친구들이 증인이라고 주장했다. 경찰국장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그는 칼라스를 바로 유치장에 가두고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칼라스는 재판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판사는 경찰국장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라고 했다. 경찰국장은 당시 어디에서나 쓰던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고문이었다. 쇠몽둥이로 칼라스를 흠씬 두들겨 팼고, 코와 입으로 물을 수십 주전자나 쏟아 부었다. 칼라스는 끝까지 죄를 자백하지 않았다. 털어놓을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스는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았고 아들을 살해했다는 증거도 없었고 목격자의 진술도 자살이라고 했지만 판사는 사형을 선고했다. 칼라스는 결국 1762년 3월 억울하게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칼라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그의 가족은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 때문에 엄청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견디다 못한 막내아들은 스위스로 달아나고 말았다.

 

 

■볼테르가 뒤집은 판결

 

이야기를 다 들은 볼테르는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곧바로 툴루즈에 살던 칼라스의 유족을 찾아갔다. 그의 아내, 아들들을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벌어졌던 자살 소동을 목격했던 이웃에게서 상세한 증언도 들었다. 볼테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던 석학이자 원로였기 때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신교도를 싫어하는 가톨릭신도이면서도 칼라스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안토니오는 자살한 게 맞아요.”

 

칼라스의 무죄를 확신한 볼테르는 변호사를 섭외해 본격적인 구원 활동에 나섰다. 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을 다룬 소책자도 발간했다. 많은 귀족에게 편지를 써서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침묵이 그의 불행을 만든 것입니다.”

 

볼테르가 억울하게 죽은 칼라스를 돕는다는 소식이 퍼져나가자 프랑스 곳곳에서 기부금이 쇄도했다. 영국, 러시아, 폴란드 국왕도 돈을 보탰다.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들이 달려와 무료 법률 자문을 맡았다.

 

볼테르의 노력 덕분에 3년 만인 1765년 칼라스 사건 상소가 이뤄질 수 있었다. 파리의 프랑스 대법원은 칼라스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가족에게는 정부가 3만 프랑을 보상하라는 판결도 덧붙여졌다. 당시 볼테르는 70세였다. 그는 최종 판결을 듣고 법원에서 나오며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당신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가 억울한 평민들을 도운 첫 사건이었다. 이 일에서 추동력을 얻은 그는 이후에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힘없고 돈없는 평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판테옹에 묻힌 볼테르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한 혁명 영웅 미라보 백작이 1791년 4월 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파괴하고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던 제헌의회는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그를 묻기에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해 고민에 빠졌다. 이때 누군가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빌레트 후작이 자유에 바치는 신전으로 삼자고 한 성 주느비에브의 성당은 어떨까요?”

 

성 주느비에브의 성당은 6세기 초에 만들었지만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18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황폐해진 상태였다. 이곳을 재건한 사람은 국왕 루이 14세였다. 전쟁에 나섰다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른 그는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성 주느비에브 성당을 화려하게 새로 짓겠다”고 하느님에게 맹세했다. 신이 도와준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왕은 극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1755년에 시작된 성당 재건 공사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미뤄지다 내부 장식 일부만 빼고는 프랑스대혁명 발생 직전에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성 주느비에브의 성당을 다 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레트 후작은 1790년 제헌의회에서 새로 지은 성당을 위인들의 공동묘지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프랑스 위인들의 조각상을 성당 안에 설치합시다.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의 판테온처럼 성당 지하에 위인들의 유해를 모시도록 합시다.”

 

 

처음에는 빌레트 후작의 제안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년 뒤 미라보 백작이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장지를 정하기 위해 소집된 제헌의회에서 논의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성당을 묘지로 바꾸는 내용의 법안은 백작의 장례식 당일에 통과됐다.

 

‘성 주느비에브의 성당은 조국의 신전이 된다. 위인의 묘지는 자유의 제단이 된다.’

 

제헌의회는 법안을 통과시킨 직후 수많은 파리 시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화려한 장례식을 열어 미라보 백작을 팡테옹에 묻었다. 반면 1000년 이상 성당에 모셔왔던 파리의 수호성인 성 주느비에브의 유해는 센 강에 내버리고 말았다.

 

미라보 백작의 장례식을 치른 제헌의회는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볼테르를 생각하게 됐다. 혁명 발생 12년 전인 1778년 5월 세상을 떠난 그는 샹파뉴의 한 수도원에 묻혀 있었다. 제헌의회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볼테르는 수많은 저술 활동을 통해 프랑스대혁명의 학술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칼라스 사건에서 보여줬듯 귀족, 제도에 억압받는 평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프랑스 최고의 인물입니다. 당연히 팡테옹에 묻혀야 합니다.”

 

볼테르의 유해 이장 행사는 미라보 백작 장례식이 열리고 석 달 뒤인 7월 11일에 열렸다. 그런데, 미라보 백작의 유해는 3년 뒤 팡테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가 국왕과 작당해 반혁명적인 행동을 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볼테르는 뜻하지 않게 팡테옹에 묻힌 첫 인물이 되고 말았다.

 

 

볼테르의 유해는 지금도 팡테옹 지하에 묻혀 있다. 관 앞에는 그의 생전 모습대로 만든 대리석 조각상이 서 있다. 직접 쓴 원고와 깃털 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판테옹에 묻힌 위인은 볼테르만이 아니다. 그의 옆방에는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묻혀 있다. 또 작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알렉상더 위마는 물론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 마리 퀴리도 이곳에 안식처를 얻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