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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최익현 선생, 제주 유배생활 그린 병풍 수묵화 발견

위리안치 내용도 담겨...충남 청양군, 면암 기록화 사업 추진
5대손 최진홍씨 "제주 유배생활 당시 남긴 고문서도 발견"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의 제주 유배생활과 일대기를 그린 수묵화 병풍이 발견됐다.

4일 최익현 선생의 5대손인 최진홍씨(59)와 충남 청양군에 따르면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고택에서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12폭 수묵화 병풍 등 고문헌 2만여 점을 발견했다.

병풍 5번째 그림과 글에는 ‘두 섬(제주도·흑산도)에서 위리안치를 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림은 높은 울타리 안 초가에서 면암 선생이 책을 읽는 초연한 모습을 담았다. 배경은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다에 돛을 단 배를 그려 넣으면서 귀양살이의 외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손인 최진홍씨는 “5개의 나무 궤짝에서 발견된 고문헌에는 제주 유배생활 당시 남긴 기록과 면암의 교우관계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간찰, 충청도 신창현감 재직 시 작성한 공문서, 중앙 관료 생활 때의 기록도 담겨있다”며 “특히,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12폭 수묵화 병풍에는 유배생활을 비롯해 전북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고 말했다.

청양군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해당 유물에 대한 분류, 사진 촬영, 목록화 등 전수조사와 기록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동부승지와 호조참판을 역임한 최익현 선생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 발행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873년 12월부터 1875년 3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제주에 유배됐다.

면암과 사제의 연을 맺은 이기온 선생은 1881년 사설학당으로 오라마을에 ‘문음서숙’을 열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제주도청 앞 도로명이 ‘문연로’가 된 이유는 최익현과 이기온을 모신 사당 ‘문연사’에서 유래됐다.

면암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이응호 등 12인의 지사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자 집의계(集義契·의병결사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당에서 1.2㎞ 떨어진 오라동 망배단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했다. 또 이곳 바위에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雪辱)하겠다’는 의미로 ‘朝雪臺(조설대)’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이 같은 선언은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기 이전인 1905년 민족의식을 지녔던 유림과 도민들이 결합한 초기 항일운동으로 꼽히고 있다.

면암은 유배가 풀린 1875년 3월 한라산에 올라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남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이듬해 최고령 의병장으로 나섰다.

1906년 4월 전북 정읍에서 거병을 했고, 관아의 무기를 접수했다. 행군을 하며 순창에 집결했을 때는 군세가 4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병력과 무기가 열세였던 최익현은 그 해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체포됐다.

일제는 재판에서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형을 선고하고, 강제로 압송했다. 그는 일제가 주는 음식은 받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 1906년 11월에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좌동철 기자 roots@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