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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용맹한 기상 되살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 얻는 한 해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인년(壬寅年) 호랑이 이야기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우리 집에서 오일장을 보러 다녀오려면 약 30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도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늘 한밤중이기 일쑤였고, 그중 10리 이상은 인적 없는 산길이었다. 막 시집을 온 새댁의 몸으로 머리에는 큰 짐을 이고 부지런히 산길을 걷다 보면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계속 뒤를 따라오는 느낌도 들었다. 어른들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호랑이라면서, 어두운 산길을 걷는 새댁을 다른 짐승들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따라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 유형 중에 하나다.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간 민중들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호랑이였다.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소망이 모여드는 산신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흰 수염의 산신 옆에는 늘 호랑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호랑이는 우리 민속에서 백성들을 지켜주는 존재이자 산신령의 전령인 셈이다. 그것은 호랑이가 가진 강력한 힘, 산중의 짐승 위에 군림하는 당당함 위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일 것이다.

조선 후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호질(虎叱)'이라는 작품이 있다. 겉으로는 근엄하고 학문이 높은 선비요, 열녀문을 받은 정숙한 여인이지만 서로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인물들을 강력하게 꾸짖으면서 징치하는 존재가 바로 호랑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호랑이가 허위의 가면을 벗겨내고 불의와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처단하는 이미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대문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말라고 붙이는 세화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미지가 반영된 것이리라.

물론 호환(虎患)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한 것도 사실이다. 강릉 화비령에는 조선 시대 호랑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아서, 호랑이를 물리치기 위해 강릉부사가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낸 기록이 전한다. 그만큼 호랑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대관령 국사 여성황당의 설화에서도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최씨 처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호랑이에게 업혀 간 처녀는 결국 대관령을 지키는 여성황이 되었다는 것인데, 호환을 당한 이야기가 산신령으로서의 호랑이 이미지와 결합하여 민속으로 전해오는 경우다.

모든 호랑이가 용맹과 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설화나 고사성어에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여우에게 속아서 골탕 먹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이야기만 하더라도 호랑이의 위세를 등에 업고 권력자 행세를 하는 여우가 등장하지 않던가. 그렇게 보면 호랑이의 권위도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술하면서도 정겨운 이미지가 있다.

한편으로 보면 호랑이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들은 조선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호랑이를 잡고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용맹했던 조선이 제국의 총칼 앞에 속절없이 허물어진 느낌이 들곤 했다. 굴곡진 20세기의 역사를 딛고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기상을 펼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포효하는 호랑이로 상징화했던 최남선(崔南善)의 바람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여전히 안고 있는 강원도지만 오히려 그것이 평화에 대한 열망을 배가시키는 것은 아닐까. 어려운 시대일수록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호랑이에게서 얻을 수 있으리라. 용맹함과 힘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지만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힘없는 시골 새댁을 몰래 지켜주면서도 권력의 불의에는 강력하게 응징하고 비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랑이의 진면목일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호랑이의 기상을 되살려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는 힘, 온갖 역병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임인년(壬寅年)이 우리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