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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크라이스트 처치, 하나님에게 헌신한 프리다의 성당

[유럽 인문학 기행-영국]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7세기 무렵 영국 옥스퍼드에 메르시아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나이가 많은 국왕인 디단이 나라를 다스렸고, 아름다운 왕비 셀프리다가 그의 곁을 지켰다. 부부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프리더스위드였다. 부부는 딸을 프리다라고 불렀다. 부부는 엘기타라는 아주 성스러운 여인에게 딸을 보살피도록 맡겼다. 엘기타는 프리다에게 종교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어린 프리다에게 늘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프리다는 엘기타의 품을 떠나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이미 신심이 확고했던 그녀는 옥스퍼드 시내에 있는 땅에 성당을 건설하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친구 열두 명과 함께 수녀가 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왕은 딸의 뜻을 지켜주기 위해 성당은 물론 수녀원도 지었다.

 

 

■악마의 유혹

 

프리다는 어렸지만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다. 수녀원에 은둔해 살았어도 그녀가 눈부시도록 예쁘다는 이야기는 먼 나라까지 퍼져나갔다. 소문을 들은 여러 나라의 왕자들과 귀족들이 프리다와 결혼하겠다며 앞 다퉈 청혼을 했다. 프리다는 이미 하나님에게 평생 헌신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결혼할 뜻이 없었다. 수녀원에서 친구 수녀들과 같이 일하고 같이 기도드리며 사는 게 훨씬 편안하고 평화스러웠다.

 

하나님이 프리다에게 선물한 평화를 싫어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악마였다. 그는 프리다를 수녀원에서 끌어내 타락한 여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악마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을 동원하기로 했다. 메르시아 인근의 레이체스터를 다스리는 엘프가라는 왕이었다. 늘 술에 취해 살았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악마는 그의 귀에 유혹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내 말대로 하면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보내주겠다.”

 

 

엘프가는 악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악마로부터 프리다 이야기를 들은 뒤 옥스퍼드의 왕, 즉 프리다의 아버지에게 사신을 보내 청혼의 뜻을 전달했다. 그는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어떤 잔혹한 수법을 써서라도 꼭 달성하는 사람이었다. 엘프가의 청혼 소식을 들은 프리다는 이번에도 거절의 뜻을 전했다.

 

“엘프가 왕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을 마치기로 결심했다는 말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혼 편지를 들고 간 사절은 프리다 공주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엘프가 왕은 아주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있지 않고 반드시 복수를 할 겁니다. 공주님은 물론 로워 메르시아에 비극의 광풍이 불지도 모릅니다. 무섭지 않으신가요?”

 

사절의 끔찍한 말을 들은 프리다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엘프가의 잔혹한 손아귀에서 자신과 나라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기도를 마칠 무렵 엘프가의 사절과 일행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악! 내 눈~ 내 눈이 안 보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프리다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이 경고의 뜻으로 사절과 그 일행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었다. 공주가 엘프가의 청혼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절단의 눈까지 멀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스퍼드 백성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교도가 대다수였던 그들은 프리다에게 사절단의 눈을 돌려주는 게 좋겠다고 간청했다. 백성들의 호소를 들은 프리다는 다시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잠시 후 사절과 그 일행들은 다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 공주님, 감사합니다. 신께서 공주님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미천한 저희들이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사절과 그 일행들은 도망치듯이 옥스퍼드에서 빠져나가 엘프가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옥스퍼드에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약간의 과장을 보태 보고했다. 엘프가는 그들의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옥스퍼드로 가겠다. 강제로 프리다를 이곳으로 끌고 와야겠다.”

 

 

■피신한 공주

 

프리다는 매일 밤 조용히 기도를 드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늘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곤 했다. 엘프가가 군사를 이끌고 길을 나선 날 밤에도 그녀는 기도를 드렸다. 다시 나타난 천사는 그녀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고했다.

 

“다른 수녀 두 분과 함께 템스 강 인근으로 가도록 하세요.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을 거예요. 배에는 다른 천사가 당신 일행을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거예요.”

 

프리다는 천사의 말에 따라 친한 수녀 두 명을 깨워 함께 수녀원에서 빠져나갔다. 템스 강에서 세 사람을 기다리던 다른 천사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옥스퍼드에서 20㎞ 가량 떨어진 애빙턴으로 갔다. 프리다와 두 수녀는 그곳 근처에 있는 벤토나의 숲으로 피신했다.

 

숲에는 겨울에 돼지를 방목하러 나오는 목동들이 잠을 자던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프리다와 두 수녀는 오두막을 깨끗이 치운 뒤 십자가를 세우고 성경을 펼쳐 작은 기도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엘프가의 횡포를 피해 3년 동안 숨어 지냈다. 마당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1년 내내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이었다. 프리다와 두 수녀는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인근 땅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으로 배를 채웠다.

 

엘프가는 잔혹할 뿐만 아니라 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곳곳에 풀어 프리다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아보게 했다.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게 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옥스퍼드로 쳐들어갔다. 그는 굳게 잠긴 성문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프리다를 당장 내 앞에 데려오거나 그녀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으면 옥스퍼드 성을 무너뜨리고 모든 마을을 불태워 버리겠다.”

 

 

디단 왕은 딸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왕과 생각이 달랐다. 집이 불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들은 왕을 배신하고 엘프가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엘프가는 프리다를 억지로 끌고 오는 강경책은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의 사랑을 보여줘 마음을 돌리게 하는 유화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아주 훌륭하고 값비싼 보물을 상자에 넣었다. 아주 로맨틱한 글과 사랑의 노래와 시를 적은 편지도 동봉했다. 그는 부하 두 명에게 상자를 주면서 신신당부했다.

 

“이 상자를 벤토나 숲에 숨어 있는 프리다 공주에게 전해주거라. 내가 잔인하고 무섭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인자하고 푸근하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

 

프리다는 오두막으로 찾아온 엘프가의 부하에게서 옥스퍼드 성이 함락되고 아버지는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배신자들이 엘프가에게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줬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녀는 엘프가의 부하들로부터 왕이 보낸 선물 상자를 받았다. 그 속에 든 편지와 노래, 시도 꼼꼼히 읽었다.

 

“엘프가 왕은 소문과 달리 정말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시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까지 보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하나님께 이미 몸을 의탁한 신세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랍니다. 절대 왕을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을 잘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부하는 엘프가에게 프리다의 거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옥스퍼드 성으로 돌아갔다. 성문을 지나는 순간 둘의 눈이 갑자기 멀어버렸다.

 

“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갑자기 눈이 안 보이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이 안 보인다고 소리를 지르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눈이 멀었다는 두 사람을 엘프가에게 데려갔다. 두 부하는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공주님은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려고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전하, 살려주십시오.”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

 

엘프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다시 결혼을 거부당한 데 대해 수치심마저 느꼈다. 두 부하가 눈을 잃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직접 벤토나 숲으로 가겠다.”

 

엘프가는 곧바로 말에 올라 프리다가 숨어 있는 숲으로 달려갔다. 부하 수십여 명도 그를 따라갔다. 마침 오두막 인근에서 딸기를 따고 있는 두 수녀가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큰일 났어. 엘프가 왕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모양이야. 어떻게 하지?”

 

두 수녀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프리다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남은 것은 하나님께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최고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맡긴 몸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프리다는 엘프가에게 붙잡힐 경우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했다. 성녀 카트리나, 성녀 셀리아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옛일을 기억했던 것이었다.

 

잠시 후 엘프가가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오두막 안으로 달려갔다. 프리다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공주! 여기 숨어 있었군. 내가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아시는가?”

 

엘프가는 흡족한 미소를 흘리면서 손을 뻗어 공주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엘프가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내 눈~ 눈이 안 보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엘프가는 프리다를 만나고 오라고 보낸 사절단과 두 부하처럼 눈이 멀고 만 것이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두 눈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공주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소. 제발 살려주시오. 눈을 다시 돌려준다면 이대로 그냥 돌아가서 다시는 공주와 옥스퍼드를 괴롭히지 않으리다.”

 

 

프리다는 천성적으로 착한 소녀였다. 그녀는 엘프가를 오두막 밖의 우물로 데리고 갔다.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올려 그의 두 눈을 씻어주었다. 하나님에게는 엘프가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잠시 후 엘프가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함성을 터뜨렸다.

 

“아! 눈이 다시 보인다. 이제 살았어. 공주, 고맙소. 내 진심으로 사과하리다. 약속한 대로 다시는 공주를 괴롭히지 않겠소.”

 

프리다는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엘프가는 세 사람에게 말과 호위 병사들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프리다는 올 때 걸어온 것처럼 갈 때에도 셋이서 걸어가겠다고 대답했다.

 

“가는 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답니다. 두려울 게 무엇이겠어요?”

 

옥스퍼드에 돌아온 프리다는 평생 수녀원에서 살았다. 나이가 들자 빈시의 손버리 우드에 작은 오두막 예배당을 지어 혼자 은둔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곳에는 식수로 사용할 만한 물이 없었다. 그녀는 성 마가렛에게 우물을 하나 선물해달라고 기도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오두막 인근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기적의 우물이 남아 있다.

 

 

프리다는 735년 10월 19일 눈을 감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만든 옥스퍼드의 수녀원에 묻혔다.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그녀의 무덤을 찾아 기도를 드린다. 그녀가 엘프가를 피해 숨었던 벤토아의 숲은 지금은 프릴샴이라는 마을로 변했고 오두막은 없어졌다.

 

프리다는 옥스퍼드는 물론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호성인이다. 그녀의 축일은 세상을 떠난 날인 10월 19일이다. 그녀는 여러 예술작품에서 물이 솟아나는 연못을 배경으로 목장(성직자들이 짚는 지팡이)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프리다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세운 수녀원과 교회는 나중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없어졌다. 지금은 그 자리에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교와 대성당이 서 있다. 에드워드 번 존스가 만든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프리다의 전설이 새겨져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