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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광해군 균형외교의 종말 인조반정 정묘·병자년 굴욕외교의 시작이었다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연세대 겸임교수)

 

누르하치 건주여진 통일 세력 키워
후금, 사르후전투서 조명 연합군 격파
명나라 쇠퇴 속 조선 광해군 균형외교
인조반정 이후 중화숭배주의 재부상
후금의 조선 침략에 인조 강화로 도피


# 끝을 향해 가는 임진왜란

임진왜란 말기, 조선에 14만여 대군을 파병해 놓은 명나라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등 남부 4도 일본 할양안(割讓案)과 함께 정동행성 같은 조선 직할통치기구를 구상했다. 일본해군은 1597년(정유년) 7월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해군을 대파했다. 일본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데 힘입어 그해 8월 일본육군 14만여명이 다시 북상했다. 고니시와 시마즈 등이 이끄는 좌군은 곧 남원과 전주를 점령했으며, 가토와 모리, 구로다 등이 이끄는 우군은 천안까지 북상했다. 다시 파천이 거론됐다. 그해 9월7일 해생(解生)이 지휘한 명군 기병대가 천안(직산) 전투에서 일본 우군을 격파했다. 복직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해군도 9월16일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해군을 격파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597년 말부터 조선군 5만여명과 명나라군 14만4,000명, 그리고 일본군 14만2,000명은 울산(가토), 사천(시마즈), 순천(고니시) 등 조선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권율(2차 김응서)이 지휘한 조선군과 양호(2차 麻貴)가 지휘한 명군 연합군이 2차례에 걸쳐 울산 서생포의 가토군을 공격했지만, 격파하지 못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했다. 다음 달 3만명의 조·명 연합군이 사천에 주둔하던 8,000명 규모의 시마즈군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일본군은 그해 11월 조·명 연합해군과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니시군은 노량해전 패배에도 불구, 시마즈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1598년 11월 해군사령관 이순신의 전사, 영의정 류성룡의 파직과 함께 끝났다. 선조는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이순신과 권율, 김시민, 황진, 정문부, 곽재우 등 조선 장군(의병장)들의 공을 폄훼하고, 명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임란 후 조선은 조선과 일본에 양속(兩屬)돼 있던 쓰시마 공략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으나, 방어가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임란 이후 강강술래가 유행했다. 강강수월래는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군이 무리를 지어 “지금 막 순찰 돈다(剛剛巡邏·gang gang xun luo)”고 외치던 것이 조선 전통놀이와 결합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임란을 겪고도 변화하지 못했다. 집권세력이 북인(대북)→서인→노론으로 이어짐에 따라 남인 출신 류성룡의 징비록도 사장(死藏)됐다. 명나라의 지원에 감사함을 의미하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 국시(國是)이자 국가윤리가 됐다. 임란 후 명나라는 농민반란과 만주족의 침공으로 인해 멸망을 향해 달려간 반면, 일본은 발전된 경제·군사·기술력과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등 명나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갖게 됐다. 이에 힘입어 일본은 19세기 말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 여진족 세력을 키우다

일본의 조선 침공은 여진족이 다시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여진족은 ①고구려의 중심을 이루던 압록강-두만강 유역 건주여진 ②부여의 고토(故土) 창춘 일대의 해서여진 ③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하던 헤이룽장 북동부·연해주 지역 야인여진으로 삼분돼 있었다. 건주여진이 상대적으로 발달된 문화와 경제구조를 가졌다. 혈연적으로 거란, 몽골과 가까운 해서여진은 예헤부(몽골 투메트부와 혼혈),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오라)부 등 4부로 구성됐는데, 예헤부와 하다부가 패권을 놓고 다퉜다. 이들은 `후룬'이라 하면서 여진 종가(宗家)라고 주장했다. 명나라는 몽골의 부흥을 막고자 여진 부족을 지원했으나, 이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명 조정은 랴오둥(遼東) 고려인 이천년의 6대손 이성량으로 하여금 여진족 대책을 총괄하게 했다. 이성량은 여진 각 부족이 서로 싸워 몽골의 동진을 저지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자 1개부를 지원해 다른 부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이에 따라 선정된 것이 젊고 유능한 아이신고로 누르하치(1559~1626년)였다. 이성량의 지원을 배경으로 강력해진 누르하치는 1583년부터 1589년까지 6년간 숙수후, 후너허, 왕기야(완안), 동오, 저천 등 5개부를 모두 장악,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그리고 건주여진을 `만주'라고 호칭했다. 만주는 곧이어 해서여진과 여타 5부족으로 구성된 9부 연합군을 격파하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백두산 부근 주셔리부와 너옌부를 병합했다. 조선과의 통상로도 확보했다. 누르하치는 300명을 1니루(화살이라는 뜻)로 하는 군사·행정조직을 만들었다. 5니루를 1잘란으로, 5잘란을 1구사(旗)로 편성했다. 니루는 중대, 잘란은 대대, 구사는 여단(旅團)과 유사한 개념이다. 누르하치는 칸으로 즉위하기 전 이미 400니루를 확보했다. 12만 대군을 보유한 것이다. 기(구사)는 군사조직인 동시에 행정조직이기도 했다. 400니루 가운데 만주·몽골 혼성 니루가 308개, 몽골 니루가 76개, 한족 니루가 16개에 달하는 등 만주는 다민족적 성격을 띠었다. 누르하치는 탁월한 경제인이기도 했다. 만주는 1616년 독립을 선언, 국호를 `금(金·Amba Aisin Gurun)'이라 하고, 수도를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운 오녀산성(홀승골성) 부근 허투알라(興京)에 뒀다. 누르하치의 금(後)에 대해 공포를 느낀 명나라는 1619년 양호를 랴오둥 경략(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양호는 선양에 주재하면서 후금에 대응했다. 명나라는 1619년 초 10만여 명에 달하는 명-해서여진 예헤부-조선 연합군을 4로(路)로 나눠 허투알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명은 부사령관격인 랴오둥 총병 이여백(이여송의 동생)과 산하이관 총병 두송, 랴오양 총병 유정 등 4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각 1로를 담당하게 했다. 후금의 라이벌 예헤부가 1만5,000명을 파병했다. 광해군 이혼(李琿)도 정권 기반인 대북파(大北派)를 포함한 성리학 사대부들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강홍립 지휘 아래 1만8,000원병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유정의 부대에 편입됐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 등과 함께 3만여 대군을 거느리고 선허(瀋河) 하안(河岸) 사르후(푸순 인근)에서 `시커먼 흙비(_)'를 정면으로 마주한 두송의 명군을 대파했다. 패전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를 나머지 3로 장군들에게 일제히 통지했다. 이는 명군의 사기만 떨어뜨렸다. 후금군은 명군을 분산·고립시킨 후 각개 격파했다. 조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강홍립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후금군에 항복했다. 사르후 전투는 명과 후금 간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누르하치는 상승세를 타고 예헤부도 평정했다. 이어 할하-코르친-자루드 부족의 몽골연합군도 격파했다.

# 후금, 조선을 침공하다

명나라 패장 모문룡은 1621년 2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피신해 왔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생각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문룡을 평안도 앞바다 가도(_島)로 보냈다. 그런데 1623년 4월 김류(김여물의 아들), 이귀, 신경진(신립의 아들), 이서, 김자점, 최명길 등 이이(李珥)를 추종하는 서인들이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렸다. 인조반정(쿠데타)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반정은 명-후금 간 균형외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광해군 폐위를 명령한 인목대비의 교서(敎書)는 인조 이종(李倧) 정권의 중화숭배주의가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명(明)을 섬긴 지 200여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 사이요. 은혜로는 부자 사이다. 재조지은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선조께서는 한 번도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으셨다. 그런데 광해는 오랑캐와 화친했다.” 명나라가 책봉을 미뤄 전전긍긍하던 인조는 모문룡을 지원, 후금을 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등 명나라의 환심을 사려 했다. 대환관 위충현이 장악한 명 조정 역시 정통성이 결여된 인조의 약점을 이용해 조선을 후금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인조가 모문룡 송덕비까지 세우는 등 저자세를 보이자, 모문룡은 조선에 군량과 군마, 조총, 병선 등을 지속 요구했다. 그런데 김류와 이귀 주도의 논공행상에서 실제 반정군을 지휘한 북인 출신 무관 이괄(李适)은 김류, 신경진, 이귀, 김자점 등보다 한 등급 아래인 2등 공신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이괄은 반정 직후 한성판윤 겸 좌포도대장으로 한성부 치안을 담당했다. 이괄은 반정 2개월 만에 후금이 침공할 우려가 있다면서 도원수 장만 추천 형식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돼 군사요지인 청천강 북안(北岸) 영변으로 떠났다. 이괄은 영변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런데 이우와 문회 등이 이괄과 안주목사 정충신, 구성부사 한명련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귀가 이괄을 잡아다 문초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인조는 타협책으로 이괄의 아들 이전을 잡아 오게 했다. 역적으로 몰린 이괄은 1624년 3월13일 영변까지 온 금부도사를 죽여 시신을 불속에 집어던지고 반기를 들었다. 이괄은 임란 시 용맹을 떨친 한명련과 함께 1만여 명의 휘하 병력과 항왜(降倭·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병으로 1만여명으로 추산) 120여명을 앞세워 개천, 순천(평남), 황주, 개성을 잇달아 점령하고, 임진강변 마탄에서 크게 이긴 후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3월26일 이괄의 군대가 임진강을 건너고 있다는 급보가 올라오자 인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한강을 건너 공주로 피난했다. 많은 백성이 피난하는 인조를 비웃었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16일 만인 3월29일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이어진 서대문구 길마재(안산) 전투에서 장만과 정충신이 이끈 토벌군에게 패했다. 이괄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이천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괄의 장래를 비관한 부하 이수백, 기익헌이 4월1일 이괄을 살해했다. 인조는 4월5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평안도 국경방어체제가 무너졌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은 후금으로 도망쳤다. 1626년 2월 누르하치가 지휘한 후금군이 원숭환이 지키던 명나라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패했다. 누르하치는 그해 8월 사망하고, 명문가로 꼽힌 예헤부 귀족 출신을 어머니로 둔 홍타이지(태종)가 계승했다. 조선군이 모문룡군과 함께 후금의 배후를 공격할까 두려워하던 홍타이지는 한윤 등으로부터 조선의 방비태세를 파악한 다음 1627(정묘)년 1월 사촌형 아이신고로 아민(형 누르하치에게 제거당한 슈르하치의 아들)으로 하여금 한윤 포함 팔기(八旗) 소속 조선인이 포함된 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군과 모문룡군을 공격하게 했다. 후금의 1차 침공(정묘호란)은 후금의 극도 식량난 등 경제위기 타파 목적이 컸다. 홍타이지로부터 자립하고자 하는 아민의 개인적 욕구도 내포돼 있었다. 아민은 철산에서 모문룡군을 격파하고, 의주와 정주, 안주, 평양 등 평안도 여러 성을 점령했다. 인조는 강화로 도피했으며, 장남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이괄의 난 이후 다시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인조는 습진(習陣·군사훈련)을 하지 못하게 했다. 광해군이 발탁한 만주 전문가 박엽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처형당했으며, 청천강 남안(南岸) 안주에서 후금군을 맞아 싸운 남이흥은 성이 함락될 즈음 폭약을 터뜨려 순국했다. 남이흥이 죽기 전 말한 그대로 기병 위주 후금군에 맞설 조선군 주력은 조총부대였는데, 군사훈련도 제대로 못 해 봤기 때문에 조총의 이점을 살릴 기회조차 없었다.

편집=김형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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