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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임진왜란 50여년 전 日 신무기 조총 도입 `전쟁史' 대변혁

백범흠 한중일 협력사무국 사무차장 (연세대 겸임교수)

 

 

일본 조총 도입 후 근세사회 토대 구축
도요토미 권력 장악 … 전국시대 마침표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국력 고려보다 약해
중화·오랑캐 논리의 성리학이 근본 원인
明 지원·이순신 등 활약에 망국은 피해


# 日 포르투갈인에게 신무기 입수

몽골 서북부와 북신장(北新彊)을 근거로 한 몽골 오이라트부 출신 에센은 칭기즈칸 가문(보르지긴씨)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몽골초원의 법’에 따라 대칸(大汗)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재상격인 타이시(太師)에 머물렀다. 1452년 에센은 실력을 갖추어 가던 칭기즈칸의 후예 토크토아부카 가한(可汗)을 죽이고 자립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대다수 몽골 부족이 에센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세력을 잃은 에센은 1454년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서만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영역으로 하던 오이라트 제국이 붕괴했다. 에센의 칭기즈칸 가문 학살에서 살아남은 바투몽케, 즉 다얀(大元) 가한은 어머니뻘 나이의 카툰(왕비) 만투하이의 도움으로 북원(北元)을 재건했다. 다얀과 만투하이의 후손들은 나중 차하르, 할하, 우량칸, 투메트, 오르도스, 융시예브 등 6개 투멘(부족)으로 나뉘었다. 다얀의 손자로 네이멍구 후허하오터 일대를 지배하던 투메트부 알탄칸 시대에 이르러 조공(국경무역) 문제로 몽골-명나라 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알탄칸은 1542년 산시성 타이위안, 린펀 등을 노략했으며, 1550년(명종 5년) 베이징 교외를 점령하고, 베이징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이때도 관망하기만 했다.

왜구도 준동했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 고려의 쇠퇴와 함께 남북조(南北朝)로 분열되었던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1338~1573년) 혼란과도 관련 있다. 전기 왜구에는 탐라 등 한반도 해안 주민들도 가담했다. 조선 태종과 세종은 울릉도가 왜구의 전진기지가 될까 우려, 쇄환정책을 실시하여 울릉도 포함 일부 섬 주민들을 육지로 불러들였다. 1563년 이후 발생한 후기 왜구는 일본 전국시대 상공업 발달로 인한 화폐경제 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명 정규군마저 극도로 잔인한 왜구와의 전투를 두려워하게 되자 중국인 중 왜구집단에 들어가는 자가 늘어났다. 후기 왜구의 70~80%가 중국인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왜구는 중국 연안 곳곳을 약탈했다. 일부는 조선, 타이완, 루손섬, 베트남, 타이, 말라카까지 들어갔다. 1644년 명나라 멸망 후 복명운동(復明運動) 주동자가 되는 중·일 혼혈 정성공 집안도 푸젠(福建)에서 밀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16세기 말 오와리(기후)의 영주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식될 기미를 보이는 등 일본 정세가 안정되고, 호종헌과 척계광 등 명나라 장군들의 활약으로 인해 왜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기 왜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대재앙의 서곡에 불과했다. 동아시아의 변방이던 일본이 역사의 중심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이 다가왔다. 무로마치 바쿠후 말기 일부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힘이 쇼군(將軍)의 힘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146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된 ‘오닌의 난’은 슈고 다이묘들 간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11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오닌의 난과 함께 △하극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됐다. 하극상의 주인공 신흥 센고쿠(戰國) 다이묘가 기존 슈고 다이묘를 대체해 나갔다. 중국 삼국시대와 5호 16국 시대, 고려 무인정권 초기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국(自國)의 경제·군사·기술력을 발전시켜야 했다. 일본의 국력이 증강되었다. 규슈 남단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에 속한 다네가시마(種子島)의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1543년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당대 유럽 최고 기계문명의 결과인 조총을 입수했다.

# 야욕 드러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해 조선은 소백산록 풍기에 무실(務實)에는 무용(無用)한 성리학자들을 양산하는 백운동(소수) 서원을 설립했다. 조총 도입과 서원 건립, 일본과 조선의 19세기를 결정한 상징적 사건이다. 다네가시마가 조총을 입수한 배경에는 풍부한 사철(砂_)과 함께 양질의 도검을 만들어 온 숙련된 기술자와 개방적인 다네가시마인들의 기질이 결합되어 있다. 오늘날 다네가시마에는 일본우주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오다는 시장을 활성화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며, 전시 자유항 사카이를 점령해 상업이익을 독점하는 등 영지의 경제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상비군을 창설하고 조총을 전쟁에 본격 도입, 전쟁 양상을 변화시켰다. 오다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연사(連射)하는 방식으로 라이벌 다케다 가문의 기마전술을 무력화시켰다. 모리와 시마즈 등 대규모 다이묘 모두 오다에게 무릎을 꿇었다. 오다는 일본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다는 조총과 함께 기독교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도 수용한 합리적 근세인으로 근세사회로의 토대를 구축한 창의적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오다는 1582년 부장 아케치의 반란으로 수도 교토 근교 혼노지(本能寺)에서 자결로 내몰렸다. 오다의 부장인 평민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기노시타 도키치로)가 권력을 장악했다.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우에스기, 모가미 등을 제외한 다이묘들을 제압하고, 전국시대를 끝장냈다. 도요토미는 1589년 6월 쓰시마도주 쇼 요시토시(宗義智)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다. 조선은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도요토미는 1592년 조선은 물론 명나라와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공언했다. 중국 저장성 닝보로 거주지를 옮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 함께 명나라를 치든지, 아니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선조 포함 조선 지배층이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었더라면, 조선이 전쟁터가 되는 것만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과 타협, 일본으로 하여금 서해와 보하이만(渤海灣)을 거쳐 베이징을 직공(直攻)하게 하고, 신립과 권율, 황진 등을 시켜 압록강 건너 랴오둥을 공격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신고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세력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으로 하여금 서한만과 보하이만 제해권을 장악하게 하여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 명나라 항구들을 봉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과 명나라는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여 두 나라 모두 피폐해 졌을 것이며, 조선은 랴오허(遼河) 서쪽 의무려산(醫巫閭山) 일대까지 확보하여 명나라에 맞먹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친명(親明)과 소중화주의라는 고정된 틀에 갇힌 조선은 그러지 못했지만, 기존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오랑캐’ 누르하치는 만주를 통일하고, 명나라에 도전했다. 그의 아들 도얼곤이 중국을 정복했다.

# 조선의 국력, 고려보다 약체

임진왜란을 당한 조선의 국력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체였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에 의하면, 당시 일본 인구는 약 2,100만명, 조선 인구는 900만~1,000만명 정도였다 한다. 일본 영토는 33만㎢(현재 영토에서 홋카이도 일부 제외), 조선 영토는 22만㎢였다. 일본의 1년 곡물생산량은 200만톤가량인데 비해 조선의 곡물생산량은 102억평에서 나오는 74만톤에 불과했다. 74만톤으로는 당시 조선 인구를 부양하기에도 벅찼다. 조선의 1년 세수는 9만톤 정도였다. 9만톤 예산으로는 행정기구를 운영하고, 상비군 1만명도 유지하기 어렵다. 당시 조선 인구와 곡물생산량에 비추어 볼 때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 하는 ‘(상비군) 10만 양병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거란과의 전쟁 시 30만명, 여진 정벌전쟁 시 17만명 이상을 동원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약체였다. 이에 반해 당시 일본은 상업과 제조업 부문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도요토미의 부장 고니시와 가토, 구로다 등이 지휘한 세계 최강 17만 일본군 선봉대가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했다. 일본군 선봉대는 밀양-상주-문경-충주를 거쳐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조선 지배층의 학정(虐政)에 불만을 품고 있던 관노 등 하층민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 천시받던 조선 백성 상당수가 일본군에 협력했다. 고니시는 평안도 평양을, 가토는 함경도 경성, 회령까지 점령했다. 고니시에게 몰린 끝에 개성, 평양, 영변을 거쳐 의주까지 도주한 선조 이연(李_)은 전쟁 발발 4개월 뒤인 1592년 8월부터 명나라에 줄기차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선조는 한때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 랴오둥(만주)에 망명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로 상징되는 유럽의 과학과 일본의 군사기술, 자본이 만난 사건이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9월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설번은 조선과 랴오둥이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임을 들어 ‘파병 불가피’를 주장했다. 병부상서 석성도 동의했다. 명나라는 몽골과 모굴리스탄 칸국이 수시로 침공하고 농민반란이 빈발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 일본군의 랴오둥 진입을 막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명나라는 1592년 12월 차관급인 병부 우시랑 겸 경략 송응창을 주(駐)조선 명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송응창은 조선에서 선조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명나라는 한반도 출신 랴오둥 전문가 이성량(1526~1615년)의 아들 이여송을 전선 사령관에 임명, 몽골 차하르부족과 투메트부족, 여진족, 다우르족(거란계) 등이 포함된 4만3,000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했다. 일본의 조선 침공전이 조선, 명나라 대(對) 일본 간 국제전쟁으로 바뀐 것이다. 1593년 1월 이여송은 포르투갈 대포와 화전(火箭) 등 신무기를 보유한 저장군(浙江軍)도 동원해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그 직후 기병 위주의 직속 랴오동군만을 이끌고 한양으로 남진하다가 고양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졌다. 명나라 지원군과 이순신, 김시민, 권율, 황진 등 관군의 활약에 더해 정문부, 곽재우, 조헌, 정인홍 포함 의병장들의 분투로 조선은 망국만은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은 울산, 부산, 고성, 순천 등 남해안을 중심으로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1597년(정유년) 8월 재침했다가 1598년 9월 도요토미가 죽은 후 철군을 결정, 1598년 11월 완전 철군했다. 명군은 이듬해인 1600년 9월 철군했다.

# 조선, 왜 약해졌나

조선이 크게 약해진 근본 원인은 중화(善)-오랑캐(惡) 논리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과 함께 1453년(단종 1년) 발생한 계유 쿠데타부터 선조 집권기인 1589년부터 1591년까지 계속된 기축참사(동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140여년간 사대부 엘리트들이 수천~수만명을 서로 죽이고, 죽는 자괴작용(自壞作用)을 일으킨 데 있다. 성종 대 이후 성리학자들의 정관계 진출이 활발해짐에 따라 조선은 공리공론(空理空論)에 찌든 나라가 되어갔다.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마저 조선 사대부들이 과거시험에서조차 성리학만을 절대시하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명나라 과거는 학풍에 얽매이지 않고, 논리와 문장력 위주로 당락을 결정했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적은 량(量)의 잉여농산물과 노예 노동력에 목을 매고 있었다. 이황 등 성리학자들은 겉으로는 도덕을 말하면서, 안으로는 토지 규모와 노비 수를 늘리는데 집착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 민족주의라는 대의를 말하면서, 안으로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조선 성리학 사대부들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주체성을 갖지 못한 데 있다. 조선 사대부 성리학자들의 인생 최고 목표는 명나라 사대부들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바로 그들의 세계였으며, 목적이었고,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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