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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강원의 명소는 지금]의병들의 충의 서린 고찰…태기왕 전설 깃든 산마루

(13)횡성 봉복사와 태기산성

 

 

신라 시대 자장율사 창건한 봉복사
횡성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
일제강점기 의병부대 주둔지 역할도

전쟁의 상흔 간직 ‘신대리 3층 석탑’
묵묵히 1,300여년 동안 이곳 지켜와
안석경 `천하지도' 모사하려 찾기도

인접한 태기산도 설화·역사의 보고
`태기산성' 세종실록 등에 기록 남아
영웅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해져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신대교가 나오고, 다리 건너 왼쪽에 마을 쉼터가 보인다. 쉼터 뒤쪽 밭 가운데에 ‘신대리 3층 석탑’이 늠름하다. 자장율사가 봉복사를 창건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선덕여왕 16년인 647년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탑이 점점 웅장해진다. 5m 높이다. 5층탑이었으나 3층만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은 더 장대하였을 것이다. 탑신을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다. 전쟁의 상흔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힘이 느껴지는 탑은 봉복산과 덕고산, 그리고 태기산을 배경으로 치열한 전쟁을 통과하여 1,30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

탑을 뒤로하고 절로 향한다. 노송 사이에 있는 부도가 절의 역사를 말하여 준다. 봉복사는 횡성군에 있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시기에 창건하고, 1747년에 서곡선사가 중건하였다. 한때 승려가 100명을 넘었으며 낙수대·천진암·반야암·해운암 등 암자만 9개나 될 정도로 큰 절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횡성지역 의병부대의 주둔지 역할을 했다. 밖에서 봤을 때 골짜기가 많아 찾기 힘들었고, 골짜기가 깊어 쉽게 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긍호의 의병부대가 근거지로 삼았으며, 이를 토대로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제천, 충주 등지로 활동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대웅전 앞 탑과 석등은 뒷산에 떠 있는 구름과 어울리는 하얀 대리석이다. 격동의 시기를 언제 지내왔냐는 듯이 고즈넉하다. 한가롭고 편안해진다.

안석경(1718~1774년)이 방문한 해는 1751년이다. `봉복사에서 천하지도를 베끼려 할 때 느낌이 있어 읊조리다'란 시를 남겼다.

“봉복산 산속 여름밤은 길기만 한데, 한 줄기 시냇물 소리 어디로 달리나. (중략) 새벽녘에 잠자는 스님 깨워 이야기하고, 지도에 글을 적자 한낮으로 치달리네.”

봉복사는 천하지도를 보관하고 있었고, 이곳을 찾은 사대부는 지도를 밤새도록 베꼈다. 당시 시대 변화를 예민하고 신중하게 받아들이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봉복사 못지않게 옆에 있는 태기산도 유서가 깊다. 설화와 역사의 보고다. 태기왕이 성을 쌓고 방어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채록 시기와 제보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전해진다.

병사를 이끌고 태기산에 들어와 후일을 도모하지만 멸망했다는 이야기 구조는, 사회적 혼란기에 민중의 추앙을 받던 민중봉기 세력의 실패담을 바탕으로 한 설화로 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유랑 광대들이나 의적의 정착 과정에서 발생한 설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태기산을 둘러싼 횡성과 평창, 그리고 홍천지역까지 태기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었을 것이다.

태기산성은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여지도서'는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성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대리에서 태기산을 오르는 길은 큰 성골을 경유해서 낙수대 방향으로 가는 코스와 작은 성골을 거쳐 가는 코스가 있다. 산성은 작은 성골로 가야 한다. 산성에 들어서자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다. 여기저기 넓은 평지도 보인다. 커다란 나무 앞에 돌을 쌓아놓은 곳은 성황당이 있던 곳이다. 사람들이 안녕을 빌었던 공간이다. 높은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흐른다. 거주하던 사람들의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태기산성 표지석이 보인다. 주변엔 무너진 성의 흔적이 또렷하다. 성의 ‘동문(東門)’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을 ‘동문밖’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태기산 정상 서쪽 중턱 해발 800~950m 되는 곳에 위치한다. 정상 쪽을 제외하고 모두 절벽이거나 급경사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하던 영웅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지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다.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영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시운(時運)이란 있는 것일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