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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하노이·하롱베이에서의 '아모르 파티'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섬 사이…하롱베이엔 낭만이 흐른다

 

해피 엔딩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다시 찾아 멍하니 볼 때가 있다. 살면서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그로 인해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 그렇다. 온갖 풍파를 겪은 주인공의, 이윽고 그 신산스러움도 다 흘려보낸 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꽃 같은 표정을 짓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 여름의 끝, 하롱베이로의 여행은 딱 그 심정으로 떠났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저 몇 년간 아무런 말없이 내 온갖 심란(心亂)을 다 듣고 고개를 끄덕여 준 '내 누님처럼 생긴 국화' 같은 선배가 주선한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였다. 아,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그 여행은 아모르 파티(Amor Party)가 되었다.

 

 

 

◆하롱베이, 아모르 파티(Amor Party)

 

하롱베이에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전해주는 이런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에 외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태로웠더란다. 그때 하늘을 지나가던 용이 이곳을 구하기 위해 입에 문 보석을 외적을 향해 뿜었고, 그 보석 파편들이 바다 위에 흩뿌려져 수천 개의 섬이 되었더라. 하롱베이는 아름다웠다. 무인도를 포함해 삼천 개가 넘는다는 섬은 보석처럼 바다 위에 떠 있었고, 태양의 위치와 구름, 간간이 흩뿌리는 비 그리고 안개에 따라 물빛도 변했다. 로빈 윌리암스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과 카트린느 드뇌브의 '인도차이나'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어 잔잔했다. 선착장에서 탄 유람선의 탑승객은 우리 일행 열두 명이 전부였다. 나라별 승선이라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일행 중에 베트남 여행이 여러 번째, 하롱베이가 두 번째라는 이도 있다. 우리가 탄 유람선을 스쳐 지나가는 배에는 예외 없이 각국 여행객들로 빼곡하다. 그들은 갑판에 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니 하오 마' '곤방와' '핼로우' 등 그들의 말이 들리는 대로 다국적 인사를 했다.

 

 

하롱베이는 통킹만 북서부에 있고, 북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해안선 길이는 120km, 이천만 년 이상 열대습지 기후에 노출된 석회암 카르스트지형이 풍화에 깎여 형성된 수많은 동굴이 곳곳에 있다.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에서 본 공중에 뜬 섬들은 장가계에서 촬영되었다지만 매트릭스식으로 말하자면 하롱베이는 지상으로 내려앉은 또다른 아바타의 세계다. 이 묘하고 낯선 곳에서, 이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니. 일행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켰다. 이 넓은 갑판에서 이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와 그리고 섬들 사이에서 어찌 음악이 빠질 수 있으랴.

 

아아, 우리는 마치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항아(姮娥)들처럼 군무(群舞)를 췄다. 일찌감치부터 나는 외삼촌이 사이공에서 보내온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던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를 따라 부르던, 시멘트바닥에 문지른 무릎 닳은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고 '딜라일라'를 연주하던 우리 큰오빠를 경이롭게 바라보던 아이였으므로 이 정도 일탈쯤은 세련되게 치를 수 있는 터였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 이 시간, 이 아름다운 바다, 이 커다란 배 위에서 아모르 파티! 유람선의 선장도 우리 일행에게 커다랗게 OK싸인을 보내 주었다. 하롱베이 유람선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나는 다시 운명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혹여 새드 앤딩 드라마가 될지라도, 다시 새로운 운명을 위해 힘을 낼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유람선에서 내린 티톱(TI TOP)섬은 작았지만 모래 해변이 있어 아기자기했다. 1962년 호치민의 유학시절 친구였던 구(舊)소련 우주비행사 티톱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섬 하나만 달라고 하자 베트남은 인민의 것이니 대신 동상을 세워주고 섬에 그의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이제 네 개의 종유석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하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하늘의 지붕' 천궁 동굴을 향해 오를 시간이다. 섬을 동그랗게 에워싼 끝없는 계단을 올라 우리가 발견한 것은 좁은 입구와 달리 하롱베이의 모든 신비와 경이로움이 깃든 신들의 대리석궁전이었다. 아마도 하롱베이를 관장하는 모든 신들은 이곳에 모여 살고 있을지도.

 

 

◆하노이, 아모르 파티(Amor Fati)

 

한 나라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 같은 격랑이 느닷없이 또는 필연적으로 밀려들기 마련인데, 그 중에서도 어느 나라보다 참혹한 운명에 맞서 조국(祖國)을 위해 붉은 피를 뿌린 이들이 있다. 베트남 국민들이다. 그들은 세계의 초강대국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그 나라의 수도가 하노이다.

 

리 왕조시대의 옛 지명은 탕롱, 통킹, '강이 많다'라는 하노이의 어원답게 수많은 강과 호수가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북한의 김정은과 트럼프가 정상회담을 하고 돌아갔을 때라 다행히 통행이 허가된 바딘광장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여기서 호치민은 1945년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광장의 호치민의 영묘는 거대했다. 하지만 생전의 그는 소탈하고 탐욕이 없어 무언가 집어넣을 주머니조차 없는 옷을 입었다. 스탈린이나 마오처럼 방부처리되어 유리관에 안장된 것이 결코 그의 뜻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식민총독관저였던 주석궁이 불편했던 '호 아저씨'는 그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나무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라디오와 손목시계, 책 몇 권을 보며 '베트남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이란 그의 어록을 설명하는 가이드의 등 뒤로 폐타이어로 만든 검은 샌들이 언뜻 보인다.

 

하노이 남쪽, 리 왕조의 수도였던 닌빈(Ninh Binh)에서 나룻배를 타고 땀꼭(Tam Coc) 동굴을 보러 갔다. 주름진 얼굴의 아주머니 뱃사공이 양발로 배를 물길에 밀어 넣어 계속 노를 젓는 모습이 안쓰러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물가의 풀숲과 물에 비치는 봉우리들만 바라본다. 문득 비인간적이라며 중국 여행에서 발마사지를 받지 않던 어느 교수님을 떠올린다. 그린파파야 향기가 아득하다.

 

여행 마지막 날, 오래된 조세프 대성당엘 갔다가 하노이 밤거리를 씨클로(Cyclo, 인력거)를 타고 돌아보았는데, 페달을 밟으며 베트남 청년이 씩씩하게 부는 휘파람 소리가 마치 불합리한 운명에 맞서 그것을 헤쳐 나가는 영웅의 서사시처럼 들려온다. 아무래도 내가 저녁 식사에 곁들인 타이거 맥주를 너무 과하게 마셨나보다. 그가 자꾸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베트남의 영웅처럼 보인다. 이 여행은 아무래도 내 운명에 예정된 필연이었단 생각이 자꾸 든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박미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