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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조선시대핫플레이스,강원의명소는지금]치악산 자락서 태종은 은둔중인 스승 ‘운곡'을 한없이 기다렸으리라

(12) 횡성 각림사·태종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조선 태종 즉위 전 공부하던 각림사
지금은 강림우체국 옆 옛터 표지석만
스승 원천석 만나고자 치악산 찾아
태종대·노구소 등 흔적 곳곳 남아


각림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각람사에 묵은 적이 있었다. 원천석에게 자문하여 깨우침이 자못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띠 집 두어 칸이 숲속에 있었는데, 태종은 즉위한 뒤 이 절을 특별히 돌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각림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치악산의 동쪽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기서 글을 읽었다. 뒤에 횡성에서 강무(講武)할 때, 임금의 수레를 이 절에 멈추고 고로(古老)들을 불러다 위로하였다. 절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고을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조세·부역 따위를 면제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강림우체국 옆에 ‘각림사 옛터' 표지석과 안내판이 태종이 공부하던 곳임을 알려준다. 건물을 지을 때 우체국과 뒤에 있는 교회부터 남쪽에 있는 면사무소까지 절의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면사무소에 들르니 직원이 건물 뒤 산기슭에 암자가 있었다고 가리킨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사이의 밭고랑을 자세히 보니 와편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축대 틈에도 와편이 보인다. 탑은 사라지고 와편과 전설만이 각림사의 역사를 알려준다.

태종이 공부하던 각림사를 떠나 태종대로 향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구소 마을이다. 태종이 스승 원천석을 만나러 이곳에 왔을 때, 원천석은 미리 알고 노파에게 자신이 간 방향과 반대로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한다. 잠시 후에 태종이 오자 노파는 원천석의 말대로 길을 반대로 가르쳐 주었고, 태종 일행이 길을 떠나자 임금을 속인 죄책감에 노파가 물에 빠져 죽었다. 노구는 노파란 뜻이고 소(沼)는 연못이다. 길 옆 안내판 옆으로 좁은 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깊은 물에 뿌리를 박고 있다. 바위엔 구연이라 새겨져 있다.

치악산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왼쪽으로 조그마한 비각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태종대'라 현판을 달았다. 원천석과 태종의 인연을 이야기해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원천석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껴 관직을 거부하고 치악산 자락에 은거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원천석을 찾아왔으나 원천석은 태종과의 만남을 꺼려 피신한다. 태종이 이곳에 도착하여 빨래하는 노파에게 운곡이 간 곳을 물었으나 노파는 운곡이 일러 준 대로 거짓으로 알려준다. 태종은 바위에서 기다리다 스승이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다. 비각이 있는 절벽 아래 암벽에 태종대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다.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태종대를 태종이 등극하기 이전에 책을 끼고 다니며 휴식하던 곳이라 전해준다.미수 허목은 같은 듯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종이 동쪽 지방을 순행할 적에 스승의 집에 거둥하였으나, 피하여 만나 주지 않았다. 시냇가 바위 위로 내려가 집을 지키는 노파를 불러 상을 후하게 내리고, 아들인 형(泂)에게 벼슬을 주어 기천감무(基川監務)로 삼는다. 이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종이 즉위하자 역말을 보내 공의 안부를 물으니 죽은 지 벌써 오래였고, 공의 아들 원통을 특별히 기천현감(基川縣監)에 제수하였다고 적었다.

홍경모는 ‘주필대기'에서 처음에는 태종대였다가 영조 때 주필대로 고쳤다고 적는다. 주필은 임금이 행차하다가 잠시 어가를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던 일을 뜻한다. 이유원은 ‘태종대'란 항목에서 원천석과 태종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준다. 태종대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주필대라고도 불렀다. 비각 안을 들여다보니 비석에 주필대라 새겨져 있다.

비각 옆 오솔길이 계곡으로 내려가더니 바위에 깊게 새긴 태종대 글자 앞에서 멈춘다. 바위 앞 시내엔 넓은 너럭바위가 넓게 차지하고 있다. 권력과 은둔과 죽음을 들려주는 태종대, 바위에 앉아 비정한 권력을 생각한다. 스승 원천석의 선택을 생각한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노파의 죄책감을 생각한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