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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역사 결정적 20장면]왜까지 참전한 백제 부흥 운동…내부 분열 속 백강전투 패배로 좌절

 

 

백제·신라 정복 후 전고려 재침하려던 당…겉으론 '백제 공벌' 선언
660년 당나라군·김유신 신라군 사비·웅진 함락 의자왕 항복 받아내
군사력 유지한 지역 호족 '복국 운동'…전고려도 신라 공격하며 도와


선비족 보륙려(Puluru·楊)씨가 세운 수나라의 양제는 612년 100만 대군을 동원, 전고려(前高麗)를 친정(親征)하기로 결심했다. 수(隋)에게 패망한 강남 진(陳)나라 출신 래호아가 지휘한 해군은 산둥반도에서 출발, 랴오둥 반도를 향해 나아갔다. 압도적 규모의 수나라 해군은 전고려 해군으로부터 크게 저항받지 않고 계속 항진, 대동강 하구를 향해 노를 저었다. 하지만, 수 해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고건무(영류왕)가 지휘한 전고려군에게 대패했다. 우중문(于仲文), 우문술(宇文述·破野頭述)이 지휘한 육군 30만 별동대는 살수전투에서 을(울)지문덕의 전고려군에게 학살당하다시피 참패했다. 전고려 정벌 실패 등으로 인해 수나라는 곧 멸망했다. 수의 전고려 침공은, 왜에서는 나카노오에(中大兄)로 대표되는 덴노가(天皇家)에 의한 외척 소가씨(蘇我氏) 제압과 국가 통합 추진으로 나타났다.

한편 전고려는 부여계를 중심으로 압록강 유역의 예맥, 말갈, 선비, 선비의 후예 거란, 돌궐, 한족 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였다. '삼국사기'에 '가족 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적힌 을지문덕은 어느 민족 출신일까? 580년 자행된 수 문제의 북주 황족 우문씨 숙청에서 살아남은 선비계 울지형(蔚遲逈) 가문 일부가 전고려로 도피해 을지(乙支·Yizhi)씨가 됐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울지(Yuchi)'는 서역(신장) 인도-이란계 호탄왕국의 왕족 'Vijaya'의 음차(音借)다. 울지씨는 선비화한 인도-이란계라는 뜻이다. 을지문덕 가계(家系)가 호탄왕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울지형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까?

# 수·당 교체기 전고려의 실책

전고려는 수·당이 교체되는 내란시기(615~625년) 4세기 모용선비와 달리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허베이(河北) 포함 관동은 전고려와 접했고, 거란과 돌궐, 예맥, 말갈 등 북방민족 수도 많았으며, 산둥반도는 전고려 해군력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 전고려는 모용선비 전연(前燕)과 달리 랴오허-압록강-두만강-대동강 유역이라는 튼튼한 후방기지도 갖고 있었다. 전고려가 수나라와의 장기 전쟁으로 인해 크게 고통받았고, 남쪽의 백제, 신라에 대한 반격이 긴요했다 해도 수·당 교체기에 중원 동향을 수수방관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전고려는 중국 내전에 개입함으로써 △전고려와 △중국 △몽골고원 유목국가 간 정족지세(鼎足之勢)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당이 부흥한 후의 천리장성 구축, 642년 10월 연개소문의 반란과 영류왕 시해는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드는 격이었다. 전고려는 중국 내전을 방관하다가 당(唐)의 소모전에 놀아났다. 신라와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5년 후인 668년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 간 내란에 처한 전고려의 수도 평양성을 점령하고, 700년 역사의 전고려를 끝장냈다.

백제 의자왕은 즉위한 641년부터 전고려, 왜와의 관계를 더 강화하는 한편, 신라(선덕여왕)를 집중 공격했다. 전고려는 남부 전선에서 풀려나 서북쪽 당과의 국경 방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의자왕은 642년 8월 부여윤충에게 1만 병력을 주어 신라의 서부 요충지 대야성(합천)을 점령케 했다. 대야성 함락으로 인해 신라는 낙동강 서안(西岸) 대부분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신라는 낙동강 동안 압량주(경산)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경산에서 서라벌(경주)까지의 거리는 50㎞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전고려에게도 압박받아 동해안 국경이 하슬라(강릉)까지 축소됐다. ①나물마리칸(재위 356~402년) 시기인 400년경 왜와 금관가야의 침공, ②소지마리칸 시기인 481년 전고려의 침공에 이어 세 번째로 신라는 다시 한 번 멸망 위기로 내몰렸다. 신라는 김춘추(무열왕)를 전고려에 보내 군사 지원을 간청하는 한편, 관산성 전투의 영웅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을 압량주 군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전열을 정비했다. 전고려가 군사 지원을 거부하자 신라는 당(唐)에 매달렸다. 한편 당은 태종 이세민(大野世民·Dayan Shimin)이 친정한 645년 전고려 침공전에서 패했다. 전고려(연개소문)는 몽골고원의 투르크계 설연타를 설득, 배후에서 당군(唐軍)을 공격하게 했다. 당군은 안시성 전투 패배에 이어 설연타군의 남하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고려는 이후 평양에서 5,000㎞ 이상 떨어진 중앙아시아 소그드왕국의 수도 아프로시압(사마르칸드)에 사신을 파견, 바르후만왕과 당(唐)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당은 설연타(646년)에 이어 소그드왕국의 종주국 서돌궐(西突厥)을 복속(657년)시켜 배후 위협을 제거했다. 당(고종)은 659년 소정방을 백제와 신라 모두를 관할하는 웅진·계림대총관에 임명하는 등 백제와 신라 모두를 정복하고 난 다음 다링허-랴오허와 한강 2개 전선에서 전고려를 재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신라를 도와 백제를 공벌(攻伐)하겠다고 선언했다.

# 국제 정세 변화 둔감했던 백제

백제(의자왕)는 당-신라 동맹 강화와 당의 강력한 전고려 정복 의지, 당의 설연타, 서돌궐 정복 등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다. 해군력 증강도 등한시했다. 백제는 660년 6월 13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함선 1,900여 척이 경기만까지 남하, 영접 나온 김법민(문무왕)의 신라 함선 100여 척과 함께 덕적도에 20여 일이나 머물렀는데도, 전고려 정복을 준비하는 줄로만 알았다. 백제는 국가 통합도 돼 있지 않았다. 충청지역 백제 호족들은 전통 귀족 해씨, 진씨 등에게 권력을 잃을까 봐 왕조 발상지인 한강 유역 탈환도 꺼려 할 정도였다.

당나라군은 그해 7월 금강을 타고 올라가 황산벌(논산)에서 부여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한 김유신의 신라군과 합세, 사비(부여)와 웅진(공주)을 빼앗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사비-웅진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의 호족들은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군과 신라군의 횡포를 전해 들은 주류성(주유성)과 임존성 등 백제 전역에서 복국(復國) 운동이 일어났다. 귀실복신(鬼室福信), 도침,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전고려는 부흥군을 도와주고자 660년 11월 신라의 임진강 유역 요충지 칠중성을 공격, 점령했다. 부흥군이 지원을 요청해 오자 당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던 왜는 난처했다. 660년 10월 귀실복신이 원병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로 왜에 머물고 있던 부여풍의 귀국 지원을 요청했지만, 왜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나면, 당이 신라와 함께 왜를 침공할 수도 있었다. 661년 8월 모친 사이메이(고교쿠) 여왕이 서거한 뒤 나카노오에는 즉위를 미루면서까지 부흥군 지원에 전력을 다했다. 특히 백제계로 추정되는 귀족들이 열성이었다. 왜는 요청받은 지 1년이 다 된 661년 9월 부여풍에게 병선 170척과 5,000명의 호위병을 붙여 귀국할 수 있게 해 줬다.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에 도착한 부여풍은 백제 장군들이 분노와 회한으로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백제 7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왜왕의 책봉을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풍왕의 부흥군은 한때 웅진과 사비 주둔 당군을 포위할 만큼 기세를 올렸다. 신라군이 주류성을 공격했지만, 참패했다. 하지만 부흥군 지휘권을 두고 귀실복신과 승려 출신 도침 간 갈등이 고조됐다. 661년 말 귀실복신이 도침을 살해했다. 이 틈을 타 당군과 신라군이 대전지역을 점령, 신라와 웅진-사비 간 보급로를 열었다. 왜는 662년 1월 부흥군에게 화살 10만개와 곡식 종자 3,000석을 원조했으며, 2개월 뒤인 3월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왜가 부흥군 지원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데는 662년 1월 전고려(연개소문)가 평양 부근 사수(蛇水)에서 당 10만 대군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평양 근처에 고립된 소정방 군단이 신라군으로부터 군량 지원을 받은 후에야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663년 3월 카미츠케노노키미 등이 지휘한 2만7,000명 규모의 왜군이 2차로 출병했다. 그해 6월 왜 선봉부대가 낙동강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 2개성을 점령하고, 서라벌 부근까지 진격했다. 양동작전의 일환이었다. 왜는 그해 8월 3차로 이오하라노키미가 지휘하는 병력 1만을 추가 파병했다. 부흥군 지원을 위해 파견된 왜군은 4만여명에 달했다. 탐라국 선단도 가세했다. 하지만 부흥군 내 귀실복신과 풍왕 간 갈등이 폭발했다. 귀실복신은 독자노선을, 풍왕은 친왜노선(親倭線)을 대표했다. 풍왕이 663년 6월 귀실복신을 살해했다. 부흥군 내부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파악한 신라는 출병을 서둘렀다.

# 백강 해전서 참패한 왜군

663년 8월 문무왕과 김유신 등이 지휘한 신라 육군 수만명과 2만여명의 병사를 태운 큰 배 위주의 당 함선 170여척이 해륙 협공으로 주류성 방향으로 진격했다. 부흥군 기병이 왜군이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신라 기병과 맞섰으나 패했다. 1,000여 척 함선에 탑승한 수만명의 왜 병사들이 백강변에 상륙할 수 없게 됐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왜 함대는 셋으로 나눠 당 함대를 공격했지만 △함선의 기능 차이와 △기상 조건 악화 △간조(干潮) 시간차 등으로 인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패했다. 왜 함선 400여 척이 불타고 1만여명이 전사했다. 사서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고 묘사한다. 에치노는 당군 병사 수십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북큐슈의 호족(豪族) 치쿠시노키미는 당군에 잡혀가 8년간 억류됐다가 귀국했다. 탐라군 지휘관도 항복했다. 풍왕은 전고려로 달아나고, 살아남은 왜 함대는 백제 유민들을 태우고 나·당 연합군에 쫓기면서 도주했다. 9월 초 주류성의 부흥군이 항복했다. '일본서기'에는 백강 해전 패배 후 백제계 관료들이 '더 이상 조상의 묘에 참배할 수 없게 됐다'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왜는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쓰시마와 북큐수, 세토나이카(瀨浩內海) 연안에 백제식 성을 쌓았다.

백제와 왜는 영국-미국 관계처럼 백제가 왜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가 5세기 웅진·사비 시대 이후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정치·군사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성 시대 아화왕, 전지왕과 웅진 시대 동성왕, 무령왕, 그리고 풍왕은 왜에 거주하다가 왜병의 호위하에 귀국, 즉위했다. 백제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설에 따를 경우 사비 시대 백제 영토는 3만~4만㎢, 왜 영토는 16만㎢ 정도로 추산된다. 인구는 백제가 왜의 3분의 1 정도였을 것이다. 당나라 두우가 지은 '통전(通典)' 백제전은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부가 옮겨갔던 랴오둥 건안성의)백제인들이 결국 돌궐과 말갈(후고려)로 흩어져 투항하고, 웅진도독 부여숭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대목은 대륙백제의 근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백범흠 강원도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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