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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427년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불러온 나비효과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장수왕 시대 '국내성→평양성' 천도 내부 대립 야기
거듭된 전쟁 통해 귀족세력 더 강해져 난세 불러와


우리 역사에서 국호를
'고려'라 한 나라는
①장수왕 이후의 고구려
②대조영이 세운 발해
③8세기경~9세기 초 랴오둥(遼東)의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
④김궁예가 세운 나라
⑤왕건이 세운 '고려'다.
이 5개의 '고려'를 구분하고,
혼동을 피하기 위해
①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전(前)고려
②발해는 후(後)고려
③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는 소고구려
④김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
⑤왕건의 고려는 그대로 고려라 칭한다.


# 동서 6,000리 영토를 일구다

터키-몽골계 탁발선비가 세운 화북(華北)의 북위(北魏)가 '육진(六鎭)의 난' 등 내란 상태에 처해 있던 531년 전고려 안장왕이 귀족세력에게 시해당했다. 노령의 형 안장왕을 계승한 안원왕도 545년 추군(?君)과 세군(細君) 세력 간 내전 상황에서 붕어했다. 안원왕을 계승한 아들 양원왕은 내적으로는 귀족세력, 외적으로는 △몽골고원의 돌궐제국과 △화북 동부의 북제(北齊) △나·제(濟) 동맹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다링허(大凌河)-시라무렌(潢水) 유역과 한강 유역 일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전고려는 이후 평원왕과 영양왕 시대에 온달과 을지문덕 등 신흥세력의 활약으로 화북을 통일한 북주(北周)와 북주를 계승한 호한융합(선비족과 한족 융합) 수나라의 공세를 극복해냈다. 그리고 신라로부터 남옥저·동예 지역과 영동(嶺東), 한강 유역 일부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서북쪽으로도 공세를 취해 시라무렌 유역 일대를 되찾았다. 이때 전고려의 영토는 동서 6,000리(2,400㎞)에 달했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을 연달아 치르면서 귀족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게 됐다. 642년 동부(순노부) 출신 대대로(大對盧)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굴종하는 태도를 취한 영류왕(고건무)이 자신을 숙청하려하자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했다. △안장왕 시해 △추군-세군 내전 △영류왕 시해 등 전고려의 내정 위기는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평양 천도는 전고려 권력 엘리트 간 내전의 불씨를 잉태한 위험한 프로젝트였다.

# 장수왕의 치세 위기의 연속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20년경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427년 수도를 압록강 유역 골짜기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 개활지 평양으로 옮겼다. 전고려의 국제 위상이 가장 높았던 때가 장수왕 시기다. 전고려는 436년 다링허 너머 랴오시(遼西)의 용성(영주·차오양)까지 진군, 모용선비 잔존세력인 북연(北燕)을 흡수했다. 438년에는 중국 강남의 송(劉宋)이 북연 세력 수용을 위해 바닷길을 통해 랴오둥으로 보낸 군대를 격파했다. 전고려는 475년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혁군주 개로왕(蓋鹵王)을 참살했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곰나루(웅진)로 천도해 국가 생존을 도모했다. 전고려군은 웅진(공주)에서 불과 24㎞ 떨어진 세종-대전 지역까지 남하했다. 전고려군은 심지어 아모성(남원)에도 출몰했다. 전고려는 충주, 단양, 원주 등 남한강 유역도 확고히 장악했다. 그리고 소백산맥의 조령(鳥嶺)-죽령(竹嶺) 너머 경북 일부까지 점령하고, 신라를 속국으로 다스렸다. 전고려는 479년 동몽골 일부(지두우)를 장악했다(동몽골에서 고구려성 유적 발견). 전고려는 481년 동해안을 따라 남진, 신라의 수도 경주 코앞에 위치한 포항까지 진격했다. 장수왕은 강력한 국력을 배경으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벌여 전고려를 △몽골고원의 혼혈 선비족 유연(柔然) △중원의 북위, △강남의 송(제)과 함께 동아시아 4강의 하나로 자리 잡게 했다. 하지만 장수왕 치세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중앙집권 등 왕권 강화가 야기한 귀족세력과의 분쟁, 수도 이전이 초래한 국내성과 평양성 세력 간 대립, 나·제 동맹의 도전 등 안정과 혼란이 반복됐다. 장수왕은 추모왕과 유리왕, 대무신왕 포함, 역대 왕들을 천손(天孫)으로 정의하고, 계루부(내부) 왕실의 신성화를 시도했다. 소외된 왕족, 귀족들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장수왕이 귀족들을 대거 숙청·살해해 어육(魚肉)으로 만들었다고 써 놓았다. 장수왕이 단행한 피의 숙청으로 인해 방계 왕족 포함, 귀족 일부는 사실상의 적국 북위로까지 망명했다. 장수왕에게는 태자 고공과 왕자 고조다 등 여러 아들이 있었다. 장수왕보다 그의 아들들이 일찍 죽은 탓에 고조다의 아들 나운(문자왕)이 장수왕을 계승했다. 장수왕 반대파가 고공과 고조다를 시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 왜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나

북위는 지배 선비족과 피지배 한족 간 뿌리 깊은 갈등을 해소해야 했다. 효문제 탁발굉은 체제 안정을 위해 선비족의 한화(漢化)를 추진했다. 효문제는 493년 수도를 산시 따퉁(大同)에서 허난 뤄양(陽)으로 옮겼다. 효문제의 한화(漢化) 정책은 북위의 비극으로 끝났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지 2년 후인 495년 선비 귀족 목태의 반란이 일어났다. 524년에는 북위 최초 수도인 네이멍구 성락(후허하오터) 근처 옥야진 병사 파륙한발릉의 선동으로 '대란(大亂)'이 일어났다. 몽골고원 유목국가 유연의 남진 저지를 위해 설치한 무천진 포함, 6진 전체로 반란이 확대돼 북위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6진의 난은 북위제국(北魏帝國)의 분열이라는 역류를 부르며, 화북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6진 반란군은 산시의 백인계열 갈족(?族) 영민추장(領民酋長) 이주영(爾朱榮)이 이끄는 북위 관군과 북위 관군을 지원한 유연군에게 패배했다. 519~559년 중원에서는 금군(禁軍)의 난(519년), 6진의 난(524년), 갈영의 난(528년), 동·서위 분열(535년), 그리고 북주-북제 전쟁 등 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시 전고려가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은 전고려 또한 안장왕 말기-안원왕-양원왕 시기 난세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전고려가 군사 개입 포함 중원 정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수(隋)의 전고려 침공이다.

# 한강 유역 일대 상실

전고려는 장수왕을 계승한 문자왕 이후 동성왕-무령왕 치세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해 한강 유역 일대를 상실했다. 동성왕 재위기인 490년(장수왕 79년) 백제는 북위가 보낸 수십만 대군을 대파했다. 동성왕은 영산강 유역에서 왜세력(倭勢力)을 일소했으며, 탐라도 무릎 꿇린 용맹한 군주였다. 무령왕 시기에도 백제는 잇달아 전고려를 격파하고, 왜를 제압했으며, 대가야와 안라가야를 포함한 가야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했다. 무령왕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됐다(更爲强國)고 선언했다. 문자왕을 계승한 안장왕은 백제로부터 일산을 포함한 한강 유역 일부를 탈환하고, 북위 영토인 다링허 중류 영주를 공격하는 등 전고려의 중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거듭된 전쟁을 통해 전고려의 귀족세력은 더 강해졌다. 안장왕은 531년 귀족세력에게 시해당했다. 아우 안원왕이 즉위했다. 왕권은 더 약화됐다. 안원왕은 545년 벌어진 평양성 출신 추군 세력과 국내성 출신 세군 세력 간 왕위쟁탈전 와중에 붕어(시해당)했다. 승리한 추군 세력은 양원왕을 즉위시키고, 세군 세력 2,000여명을 처형했다. 양원왕 시대에도 전고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귀족 세력은 2인자인 대대로가 되기 위해 평양 시내에서 사병을 동원, 전투를 벌였다. 선비족 고환(高歡)이 세운 북제(北齊) 문선제(고양)는 552년 전고려에 사신을 보내 동위-서위 전쟁 시기 전고려로 흘러들어간 유연계 주민을 송환하라고 압박했다. 약체가 돼 버린 전고려(양원왕)는 이에 굴복해 유연계 주민 5,000여명을 북제에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557년 10월에는 국내성 귀족 간주리(干朱里)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무렵 전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오던 몽골고원의 혼혈선비 유연이 터키 계통 돌궐에 밀려 약화되면서 랴오허의 서북쪽 지류 시라무렌 방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부민(Tumen) 가한의 돌궐은 동진해 전고려의 통제를 받던 시라무렌 유역 거란족 일부를 복속시켰다.

# 한반도 중부 패권 대결

551년 3월 백제-신라-대가야 연합군이 한강을 넘어 북진해 왔다. 돌궐의 서북방 국경 공격 계획을 간파한 전고려(양원왕)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고려는 그해 9월 장군 고흘(高紇)을 파견, 랴오허 유역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해 온 돌궐군을 물리쳤다. 553년 10월 양원왕이 지휘한 전고려군은 성왕의 태자 부여창(위덕왕)이 이끈 백제군과의 백합야(김포시로 추정) 전투에서 대패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전고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를 백제로부터 떼어 놓는 데 성공했다. 신라는 빈집털이 하듯 한강 하류 일대에서 백제군을 몰아내었다. 충청도와 전북 기반 호족세력의 철저한 비협조로 인해 한강하류 지역 지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성왕)는 553년 말부터 일부 호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산성(옥천) 일대에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554년 가을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놓고 관산성 일대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을 벌였다. 부여창이 지휘한 백제군은 대가야와 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금관가야 왕자 출신 김무력이 지휘한 한강 유역 주둔 신라 신주군(新州軍)에게 뒤통수를 맞아 참패했다.

한편 돌궐제국은 552년(터키 건국 기원) 유연을 멸망시킨 후 더 강해져 555년경 시라무렌 유역 거란족 대부분을 합병했다. 559년 평원왕이 양원왕의 뒤를 이었다. 우문선비 북주(北周) 무제 우문옹의 북제 정벌 시 영주를 다스리던 북제 황족 고보녕은 투항을 거부했다. 북주군이 고보녕 군대를 공격했다. 북주군이 영주까지 쳐들어오자 전고려는 위협을 느꼈다. 평원왕이 파견한 부마(駙馬) 온달(Ondar)은 577년 랴오시 이산 전투에서 북주군을 격파했다. 사서(史書) 묘사로 보아 온달은 광개토대왕 시대 이후 전고려에 복속된 몽골계 부리야트족(러시아 투바공화국 거주) 출신으로 추측된다. 온달은 590년(영양왕 1년) 아단성(단양) 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 북주 침공 시기 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상류 지역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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