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정기 4·3일반재판으로 수형생활을 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유족 등 24명이 재심을 청구했다.
제주4·3도민연대(대표 양동윤)는 20일 생존 수형인 고태명씨(89)와 유족 등이 참여한 가운데 재심 청구서를 제주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이들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3·10도민 총파업에 연루됐거나 미군정의 양곡(보리) 강제 공출에 반발했다가 일반재판에 넘겨져 옥살이를 하거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야학을 운영한 혐의로, 마을 청년을 집안에 숨겨줬다는 이유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미군정기에 기소돼 일반재판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을 당했다.
이어 미군정청 포고령 2호(무허가 집회·시위)와 군정법령 19호(공무집행방해) 위반 혐의로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고태명씨는 “고향인 구좌 동복리에서 야학을 열고 부녀자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경찰에 끌려가 전기 고문을 당했고, 무허가 집회를 열었다는 죄를 뒤집어 썼다”며 재심 청구 사유를 밝혔다.
고(故) 이경천씨의 유족은 “애월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출범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 후 징역 8개월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울러 미군정은 대흉년에도 1947년 6월 옛 북제주군에 1만800석, 옛 남제주군에 6200석의 보리(양곡) 수매량을 할당했고, 곡식을 빼앗기게 된 농민들이 항의를 하자,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양동윤 대표는 “유족 대다수는 아버지가 체포된 이유와 감옥살이를 한 것 사실도 몰랐다가 국가기록원에 있는 판결문을 통해 죄명과 형량을 알게 됐다”며 “부당한 공권력의 피해를 바로 잡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지난 2월 4·3특별법 개정안 통과 이후 처음으로 재심이 청구됐다. 특별법은 군사재판 수형인은 4·3위원회가 법무부에 일괄 직권재심을 권고할 수 있고, 일반재판 수형인도 개별 특별재심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재판 수형인들도 불법 구금과 고문을 당한 만큼, 이전에 있었던 판결의 연장선상에서 무죄를 이끌어 내겠다”고 말했다.
한편 미군정기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은 제주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도민 3만여 명은 기념식이 끝난 후 관덕정까지 ‘통일 조국 독립 전취’, ‘삼상회의 지지’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해 5월 3·1사건과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 중 104명은 징역형 또는 집행유예를, 56명은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아울러 미군정은 대흉년에도 양곡의 매점매석을 차단하고, 식량의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 1947년 6월 옛 북제주군에 1만800석, 옛 남제주군에 6200석의 보리(하곡) 수매량을 할당했다.
이에 한림읍 명월리와 안덕면 동광리 등에서 보리 강제 공출을 거부하는 시위와 충돌이 발생했다.
4·3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17일 제주지역은 계엄령이 공포돼 이후에 기소된 도민들은 일반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좌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