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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6) 광활한 우주 속으로 들어간 천재 시인, 박정만

  • 기고
  • 등록 2020.12.10 12:43:06

세상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그 재능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라북도문학관에 게시된 작고 문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시인이 있다면 그는 박정만 시인이다. 그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마흔을 갓 넘기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 죄도 없이 국군 보안사령부로 잡혀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유독 아파했던 시인, 그의 짧은 생애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 되었다.

시인은 1946년 8월 26일, 전북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5년, 시인은 경희대학교 주최 고교생 백일장에서 시 「돌」로 장원으로 뽑혔다. 1967년에는 경희대학교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대학 1학년 때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1972년에는 문화공보부 문예 작품 공모에서 시 <등불설화>와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시인은 학원문화사ㆍ중앙문화사 등의 출판사와 ‘월간문학’, ‘어깨동무’ 등의 잡지사에서 근무하였고, 1980년에는 ‘고려원’의 편집부장이 되었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잠자는 돌』을 낸 이래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서러운 땅』, 『저 쓰라린 세월』,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혼자 있는 봄날』, 『어느덧 서쪽』, 『슬픈 일만 나에게』 등의 시집을 냈고, 유고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시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시인은 1981년 5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시인은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동안 유령처럼 누워서 지내다가 집을 뛰쳐나와 유랑하는 등 시인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보안사에서 당했던 치욕의 순간을 잊기 위해 밤낮 술독에 빠지면서 더 큰 고통에 휘말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던 날, 시인은 제목도 없는 다음과 같은 2행짜리 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좋은 시를 열심히 썼던 시인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의 사인(死因)은 ‘간 경화’였지만, 그의 죽음은 1981년의 ‘한수산 필화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아무 죄도 없는 한 시인이 이렇게 참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이는 무도한 역사가 빚어낸 재앙이었다. 당시 한수산은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1970년대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을 통속적으로 그려냈는데, 다음과 같이 군(軍) 관련된 언급이 있었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이것이 당시 군사정권의 수뇌부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을 자신들의 정권을 모독하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군 보안사(당시 사령관은 노태우였다)에서는 한수산과 중앙일보사의 문화부 관련자 손기상, 권영빈, 정규옹, 이근성, 그리고 여기에 의외의 인물 박정만을 잡아갔다. 시인과 한수산은 서로 잘 알지 못했다. 보안사에서 한수산에게 연루자를 대라며 윽박지르자 박정만의 이름을 댄 것이다. 한수산은 시인과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금방 풀려날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사도 하지 않고 시인을 극악무도하게 짓밟아 버렸다. 정치도, 권력도, 이데올로기에도 관심이 없었던 시인에게는 매우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시인의 영혼은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시인의 첫 시집은 1979년 12월 ‘고려원’에서 낸 『잠자는 돌』이다. 이 시집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국적 서정이 잘 드러났다는 평가다. 김재홍은 시평에서 “소멸과 애환의 표층 정서와 순결한 생명력과 부활 의지라는 심층구조로 이루어진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 시집의 “비극적 현실은 어둠으로 표상되고, 어둠의 종결은 죽음의 세계로 귀착된다.”라고 했다.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중략-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감고 천 년을 깨어 있는 봉황(鳳凰)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禪) 모양으로.

-박정만의 시 「잠자는 돌」의 일부



첫 시집의 표제작 「잠자는 돌」에는 그의 비극적 종말을 예감한 듯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라고 읊더니, 그렇게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인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시인을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고 불렀다. 이혼 후, 세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 압박이 대단했을 법한데, 시인은 돈 버는 일보다 술 마시고 시 쓰는 일에 더 신명을 냈다.

황동규 시인은 박정만의 시선집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에서 시인의 문학을 “서정적 서정시”라고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포괄적 역설’ 혹은 ‘포괄적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의 시 「저 강물 속으로」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참다운 삶으로 변모하려는 기원이 담겨 있다. 그런데, 막상 이어지는 표현 ‘강물 속으로, 푸른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고 싶다’에서와 같이 ‘포괄적 역설’ 기법을 썼다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에서 문성재 쪽으로 몇 마장쯤인가 들어가면 무릉도원이라는 곳이 있다. 무릉이라는 마을과 도원이라는 마을이 한 마장쯤 격해 있는데, 구불구불한 산굽이를 타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 속으로는 가을 강의 단풍들이 어지러운 색동저고리처럼 갓을 펴고 있었다. 아, 나는 살고 싶다. 저 강물 속으로, 푸른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고 싶다.

-「저 강물 속으로 」 전문



시인의 삶에는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 외에도 ‘1987년에 쓴 시 300편’ 사건이 있다. 시인은 1876년 여름, 20여 일 동안 술독에 빠져서 연달아 300편의 시를 정신없이 썼는데, 이는 그때까지 자신이 써온 시보다 더 많은 숫자다. 시인은 시를 쓴 후, 날짜와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 이는 술에 취한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얻고, 마치 접신(接神)의 경지에서 시를 쏟아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떨어진 단추처럼 헌 고무신처럼

메마를 땅으로 자꾸만 흘러간 목숨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피리어드 찍듯이 그렇게 흘러간 목숨



외씨버선으로 고리짝에 눈깔만 남아.

-「흘러간 목숨」(1987년 9월 9일 새벽 5시 30분)



하루에도 몇 수씩 시를 썼지만, 이때 시인은 자신의 삶을 ‘피어리드(마침표) 찍듯이 그렇게 흘러간 목숨’으로 보았다. 마치 다가올 죽음을 예감이라고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그의 초기의 시는 기존 작가들의 시류와 비슷했지만 ‘한수산 필화사건’ 이후에는 서서히 다가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한 듯, 직설적으로 죽음을 언급했다.



간이 점점 무거워 온다

검푸른 저녁연기 사라진 하늘 끝으로

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

하루내 내 울음을 대신 울다 갔다.

-「죽음을 위하여」 일부-



그해 10월 2일 일요일 오후 서울올림픽 폐막식이 있던 그 시간에 시인은 아무도 없는 봉천7동 연립주택 1층, 시인의 집에서 홀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가 운명한 시간은 세 자녀도 모두 집을 비운 상태여서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메아리도 살지 않은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 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녹을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산 아래 앉아」 전문


이 시는 시인의 고향 내장산 호수 옆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다. 메아리도 살지 않은 산은 어디이며, 그리운 이의 이름은 누구일까. 그리고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 시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인의 한(恨) 많은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돌아보게 한다.

전북일보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