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령 관창리에서 대규모 집단으로 확인된 “주구묘”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파서 돌린 분묘)는 한국 고고학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주구묘의 연구결과 마한 성립기 이후 발전기에 마한고지에서 폭넓게 조성되었던 마한의 대표적인 묘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러한 주구묘가 관동에서 구주지역까지 분포되어 있어서 야요이시대(B.C 3세기∼A.D 3세기)의 독자적이며 보편적인 묘제로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관창리 유적이 발견된 이후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야요이 문화의 원류는 한반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현장에서 가끔 우스갯소리로 ‘유적의 발견도 유행을 쫓는다’라는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면 동일한 성격의 유적이 잇달아 발견되기 때문에 나온 얘기이다. 그것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구묘도 예외는 아니어서 익산 영등동과 서천 당정리에서 주구묘가 잇달아 발견되었고, 1999년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구간에서 다수의 주구묘 유적이 조사되면서 마한의 대표적인 묘제임이 확인되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은 고려대학교 매장문
강암 선생의 괴석도에는 괴석을 그린 모습이 기이하고 의미가 깊다 하겠지만 괴석과 함께 어우러진 강암의 문장이 더욱 작품을 빛나게 한다. 괴석의 자태와 글이 조화롭게 표현되어 무심코 지나쳤던 석물의 존재감을 다시금 돌이켜 본다. 한문으로 된 문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명당이나 커다란 집을 지을 때 쓰일 것이라고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듬잇돌이나 맷돌이 될 수도 없었다. 단지 사람들이 감상용으로 눈여겨 돌아 보아주는 돌이 되고 싶었다. 하찮은 벌레인 이처럼 작은 것도 수레바퀴처럼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이 돌을 본다면 마치 태화봉이 불끈 솟아오르고 안개와 노을이 용솟음치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들 것이다. -중략- ” 보잘것없는 석물도 예로부터 쓰임이 많았다. 집을 짓기 위해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생활을 위한 방편의 수용으로도 크고 작은 돌은 활용되었다. 때론 전쟁터의 도구로도 사용되었으니 모든 석물은 강암 선생의 글처럼 태화봉처럼 솟고 안개와 노을같이 용솟음쳤으리라. 돌의 쓰임은 그렇게 역사를 잇고 전해지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돌은 몸을 고치는 약재로 쓰였으며 마음의 수양을 위한 악기의 재료
최창학 소설가는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1년 7월 26일, 전북 익산시 오산면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오산남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54년 이리로 이사하여 이리동중과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19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신구문화사와 민음사 등에서 근무하였으며, 1978년부터는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7년 2월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1968년 중편 「창(槍)을 『창작과 비평사』에 발표하면서 문단의 이목을 끌었다. 이 외에도 『바다 위를 나는 목』(1979), 『하늘의 침묵』((1983), 『긴 꿈속의 불』((1988), 『창(槍)』(1990), 『가사자의 꿈』(1994), 『아우슈비츠』(1997), 『케모포트』(2019)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최창학은 해방과 전쟁, 유신독재 시대를 살아오면서 한순간도 불안과 공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손주를 돌보기 위해서 상경했던 부모가 자신의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사고를 겪었고, 첫아들의 죽음을 아프게 대면해야 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전쟁과 사회적 갈등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
박습(朴習, 1367~1418)은 태종 15년(1415) 3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그 해 11월경 이임하였다. 그는 전라감사 재임시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형조판서에 올라 세종의 국구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상왕 태종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박습은 태종과 같은 해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던 동방급제자요 태종대 원종공신이었다. 태종 이방원과 고려말에 동방급제(同榜及第) 박습은 함양 박씨로 아버지는 이부 상서 박덕상(朴德祥)이고, 할아버지는 호부 상서 박원렴이며, 증조부는 병부 상서 박인계이다. 박습의 아들 박의손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아버지 박습이 처형된 후 죽임을 당했다. 박의손의 4대손 박대립(朴大立)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좌찬성을 지냈다. 박습은 1383년(고려 우왕 9) 과거시험에 동진사(同進士) 19위로 급제하였다. 이때 그와 같이 합격한 동방급제자들이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등이다. 김한로가 을과 1등 장원, 심효생이 을과 2등 방안(榜眼, 차석), 이방원은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에는 갑과가 없어서 을과 1등이 장원이다. 동진사
전북일보사는 16일 오전 본사 회장실에서 정기주주총회 및 이사회를 열고 대표이사 회장에 현 서창훈 회장을, 대표이사 사장에 현 윤석정 사장을, 부사장에 현 백성일 부사장을 재선임했다. 서창원 이사와 김은정 이사도 이사로 재선임했다. 사외이사에는 마동훈 고려대학교 교수와 김윤태 우석대학교 교수가, 감사에는 조계선 변호사가 모두 재선임 됐다. 전북일보
◇정순아 씨(89세) 별세, 김관수(사회복지법인 혜산 이사장)·김춘수(엠마오장례식장 대표)·김위영(한우리독서논술원장)·김지숙 씨 모친상, 윤욱희(엠마오사랑병원장)·고숙·강현자(한우리 독서논술) 씨 시모상, 김영윤(항도엔지니어링 전무)씨 빙모상, 빈소-전주 엠마오사랑병원장례식장(전주시 완산구 서원로402-35 (063-285-4411), 발인 18일 오전 8시 고창대산선영, 010 3674 0194
전북의 서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본향’이라 일컬을 만큼 마한의 성립과 성장에 관련된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익산 미륵산, 남쪽으로는 김제 모악산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이 막아주고 있어서 분지와 같은 지형이지만, 서쪽으로는 지평선이 보일만큼 널따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야로 형성된 분지와 같은 지형의 중앙으로 만경강이 흐르면서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기에 농경을 영위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천혜의 지역이다. 만경강의 북쪽 익산지역은 일찍이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오면서도 금강유역의 백제문화권역에 포함되어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익산지역의 대부분 유적들은 금강이 아니라 만경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유역과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만경강문화권역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김제 지역에서 마한관련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완주 갈동유적이 발견된 이후 마한 성립을 뒷받침하는 토광묘 유적들이 130여기 이상 봇물 터지듯
개국원종공신으로 우의정 역임 유관(柳寬, 1346~1433)의 본관은 문화, 초명은 관(觀), 자는 몽사(夢思)ㆍ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이다.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삼사판관 유안택이다. 이름자를 ‘觀’으로 쓰다가 세종 8년(1426) 그 아들 유계문이 충청감사로 임용되자 관찰사의 ‘관’자가 유관의 이름 ‘관’자와 같다고 하여 ‘寬’으로 고치었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건국후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태종 원년 사헌부 대사헌에 임용되어, 승려 수를 줄이고 5교 양종을 폐할 것을 상소하는 등 불교를 적극 배척하였다. 태종 2년 계림부윤으로 나갔다가 무고를 당해 그의 본향 황해도 문화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태종 5년(1405)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으며, 태종 6년 예문관 대제학, 태종 7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를 겸해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세종 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고려사』를 개수하여 올렸다. 세종 8년 1426년, 81세에 우의정으로 치사하여 88세에 졸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해 선정을
금년 6월 10일부터 시행 예정으로, 2020년 6월 9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약칭: 역사문화권정비법)이 제정되었다. 제1장 총칙에 보면, “이 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조사하고 발굴·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법 제2조(정의)에서는 ‘마한역사문화권’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 마한 시대의 유적·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을 뿐, 전북지역의 마한 성립과 발전에 관련된 유적들을 제외하고 있어 많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먼저 우려되는 점은 영산강유역 중심의 전남지역의 마한 연구만으로는 제대로 된 마한사를 복원할 수 없는 절름발이 연구에 머무르게 될 것이란 점이다. 또한 자칫 소지역주의에 치중된 나머지 편향되고 왜곡된 연구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문화권정비법’의 마한역사문화권역에서 전북지역 마한의 역사와 문화가 제외된 것은 전북의 정치권이나 행정, 그리고 학계마저도 한걸음 뒤처져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
송남 이병기 선생은 1931년 3월 10일, 전북 김제시 월촌면 명덕리 142번지에서 태어났고, 2008년 10월 9일 타계했다. 1956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북대 대학원 석사,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익산의 남성여고를 비롯하여 도내 중등학교에서 10여 년간 근무했으며, 1975년부터는 전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은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석류초」, 「소연가」 등이 당선되면서 문단의 시선을 끌었다.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석류초』 등 9권의 시집과 연구서 『황매천 연구』 등 5권, 번역서 『역주매천황현시집』 3권(공역) 등을 펴냈다. 신성적 시인은 선생의 첫 시집 『석류초』 서문에서 “시인은 새가 그 천후(天候)에 따라 까마귀처럼 어두운 조가(弔歌)를 부를 수 있고, 소쩍새처럼 통곡할 수 있고, 꾀꼬리처럼 구슬을 굴리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중조(衆鳥)’이어야 하며 “폭풍우에 거목(巨木)이 흔들릴지언정 제자리를 잊지 말고 보다 먼 앞날을 노래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송남 이병기 선생은 석정의 말씀대로 “중조의 시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