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호남지방의 불화를 대표하는 ‘장성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회상도’가 보물로 승격된다.장성군에 따르면 해당 문화재는 오는 2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보물 지정이 예고됐다.장성 백양사 아미타회상도는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2066호)의 후불탱화로 가로 234.2cm, 세로 338.7m이다. 제작 시기는 1775년이며 색민을 비롯해 총 11명의 화승(畵僧)들이 참여했다. 안정감있는 구도와 주제를 극대화시키는 짜임새 있는 구성, 섬세한 인물 묘사, 담체 기법을 활용한 채색 등이 특징이다. 당대 가장 뛰어난 화승인 의겸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편 백양사 아미타회상도는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최종 지정될 예정이다. 승격을 마치면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 설법도 및 복장유물’로 변경된다./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17세기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신들의 충성 맹세를 담은 조선 최대 규모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이 국보로 승격됐다. 총 길이 24m에 달하는 이 문서는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고려시대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정리한 ‘고려사’ 6건이 보물로 지정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등 고대와 조선 관련 중요 문헌들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상황에서 이번 ‘고려사’ 보물 지정은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 사료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울러 19세기 중반 전주서 간행한 ‘홍길동전’ 원간본(초간본) 2종이 처음으로 발굴돼 눈길을 끈다.문화재청은 조선 숙종 때 공신들의 충성 맹세 서약이 담긴 왕실문서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를 국보로, 고려의 문물과 제도 등 풍부한 자료가 수록된 ‘고려사’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최근 발표했다.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이십공신회맹축’은 1680년(숙종 6) 8월 30일 열린 회맹제(會盟祭)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 제작됐다. 회맹제는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
백제시대 금동신발 2건이 사상 첫 보물로 지정된다.문화재청은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과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16일 밝혔다.두 금동신발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 삼국시대 고분 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 그동안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많이 지정됐지만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동신발은 삼국 시대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고대 금속공예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 고분에서는 유사한 형태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다.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지난 2014년 대형 분구묘인 1호 석실 제3목관에서 발굴됐다. 5∼6세기 영산강 유역에는 복암리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됐는데, 이 가운데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으로 평가된다.특히 금동신발의 발등 부분에 부착된 용머리 장식은 현존 삼국시대 금동신발 중 유일한 사례다. 최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분석 결과, 신발 주인이 40대 여성으로
“나는 광주를, 무등산을 누구보다 사랑한다.”지난 5일 84세로 별세한 강신석 목사는 일평생 종교, 교육, 통일 등 사회활동에 헌신한 광주지역 대표 원로다. 생전의 그는 광주와 무등산 사랑이 남달랐으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무등산 자락에 거주했다.고인은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으며 종교·교육·통일 등 전반에 걸쳐 활발한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1992년 한국실로암 선교회 회장, 1994년 광주YMCA이사장, 2003년 5·18기념재단이사장,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07년 5월 광주 무진교회(기독교장로회)에서 자원해 은퇴했다. 무엇보다 강 목사에게는 ‘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운 목회자’라는 평가가 따른다.고인은 1976년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 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했다. 그로인해 동료들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5·18은 그의 삶에서 떼래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예비 검속으로 수배 명단에 포함됐지만 서울로 상경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일 대사 등을 만나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이로 인해 신군부에 붙잡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데 헌신했던 ‘민주화운동의 거목’ 강신석<사진> 목사가 지난 5일 별세했다. 향년 84세.고인은 1938년 8월 24일 광주에서 아버지 강주원 목사와 어머니 명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대성초등, 광주서중을 거쳐 광주고에 진학했으며 이후 한신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강 목사는 부친인 강주원 목사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며 아들 강의준 목사도 목회활동을 하는 등 3대가 목사 집안이다. 고인의 삶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으로 요약된다. 1976년 유신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1년여 수감 뒤 특별사면 됐다. 이후 80년 광주민중항쟁, 5·18특별법 제정 투쟁 등에 앞장섰다. 특히 김영삼 정권 시절 5·18특별법 제정 100만명 서명 운동은 한국 역사상 첫 100만 명 서명을 받아낸 민주화운동의 이정표로 평가된다.이밖에 강 목사는 교육민주화, 통일운동, 사회적 약자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매진했다. 민주화와 통일 분야 기여 공로로 제25회 한신상을 수상했다.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강 목사에게 국민훈장 모
순천 팔마비’는 순천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 고려 1281년(충렬왕) 이후 승평부사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이다. 승평부는 지금의 순천이다.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인 ‘순천 팔마비’가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전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26일 밝혔다. 팔마비에 기록된 승평부사 최석은 ‘고려사’에도 등장할 만큼 당시 지역민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다. 최석은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다. 이에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웠다. 이후 정유년(1597년) 병란으로 완전히 훼손됐지만 1616년 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에 의해 건립됐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에까지 전해졌다. 비석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광주 최초 도심공원인 광주공원의 기능을 되살리고 구도심 일대를 활성화하기 위해 공원 주변 14개 기관이 함께 시작한 ‘광주공원 광합성 프로젝트’가 올 한해 활동을 본격 시작한다. 이번 ‘광주공원 광합성 프로젝트’는 지난해 14개 기관의 협약을 통해 시작됐다. 광주향교·성거사·419문화원·광주시민회관(도시문화집단CS)·임방울국악진흥회·사직문화보존시민모임·광주공원 노인복지관·광주매일신문·영무토건·푸른도시사업소·마을기업 꿈꾸는거북이·심비오협동조합·광주남구마을공동체협력센터·광주문화재단 등(이하 구구 구동이)은 지난해 광주공원의 역사공원 기능 회복을 위한 공동협력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올해는 구구 구동이들이 함께 로컬의 멋(천년 의향 역사)을 품은 그린뉴딜(도심공원) 및 디지털뉴딜(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거점 공간을 목표로 중장기 할 일을 계획했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광주공원’ 조성을 위한 구구 구동이 활동가 양성 이 꼽힌다. 또한 광주시 1호 공원 ‘역사·문화관광지’ 명성 회복을 위한 역사관광, 예술관광 활성화와 3·4·5·6월 의향 정신 테마 문화행사의 거점이 되는 광장 조성이 꼽힌다. 아울러
문학관은 작가의 문학적 혼과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특히 문학관은 지역 문화의 중심 내지는 콘텐츠 생산 기지, 나아가 문화관광의 구심점이 된다. 문학관이 문인의 창작활동과 관련된 기록 보관서로서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다. 단순한 예술적 공간을 넘어 사유와 사유,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이 합류되고 교섭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공간이다. 광주문학관의 건립 당위성, 지금까지의 추진 약사를 비롯해 문학관을 어떻게 꾸미고 콘텐츠를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콘텐츠추진위 활동 등을 다각도로 점검했다. 특히 광주의 첫 문학관으로서 ‘광주문학관’의 콘텐츠를 어떻게 채울지는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최근 열린 콘텐츠위원회 회의 결과는 광주문학관이 문학인과 시민들의 염원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문학관 건립 당위성과 장소 현재 전국에는 80여 개 문학관이 있다. 그러나 문화수도라 자처하는 광주에는 문학관이 없다. 문학관이 없는 광주에, 내로라하는 문학인은 많다. 이를 문학적 용어로 아이러니라고 한다. ‘나두야 간다’의 박용철, 동요 ‘강아지’, ‘봄맞이’ 로 유명한 김태오, 광주가 키워낸 ‘고독의 시인’ 김현승, ‘휴전선’의 박봉우, ‘전
1980년 5·18 당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데 앞장섰던 정형달<사진> 바오로 신부가 선종했다. 향년 78세. 18일 천주교 광주대교구에 따르면 정형달 신부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정 신부는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린 ‘사제의 맥’을 잇는 분이다. 조비오 신부, 김성용 신부, 정형달 신부로 맥이 이어졌다는 평가다. 1943년 나주에서 태어난 정 신부는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해남본당, 농성동본당, 임곡본당, 옥암동본당 주임신부를 지냈으며 지난 2011년 퇴임했다. 고(故)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는 “정형달 신부는 조비오 신부와 김성용 신부가 당시 영어의 몸이 됐을 때, 서울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뵙고 구명활동을 전개했다”며 “무엇보다 5·18의 진상규명이라는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또한 “생전의 조비오 신부와 ‘광주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며 “두 신부님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위해 애썼던 ‘민주화운동의 스승’”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정 신부는 5월 관련자들의 사면과 구명운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백호 임제문학관을 가기 위해서는 나주읍을 거쳐 영산강과 다시 들판을 지나야 한다. 강과 들을 거느리며 가는 길이다. 다시면은 곡창 나주평야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다시(多侍)는 ‘삼백’의 고장으로 불리었다. 쌀, 누에고치, 목화가 다량으로 생산됐다. 영산강의 한복판으로 광주와 함평을 잇는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논과 논이 겹치고 들과 들이 겹쳐 평야를 이룬 이곳은 비옥한 농토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 때 수탈의 대상이 됐던 건 그 때문이다. 추수가 끝나는 이맘때면 근동에 산더미 같은 나락가마가 쌓였다. 기흥리에서는 기원전 1050년께로 추정되는 벼화분이 검출되기도 했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숭늉 같은 강물이 넓은 평야를 살찌웠던 것이다. 모든 곡창은 시간과 강의 합작품이다. 바람과 햇볕이 부조를 하고 농부의 피와 땀은 거름이 된다. 눈앞의 들녘은 오랜 시간 풍화와 수탈을 견딘 남도의 자랑이요 자부심이다. 단순한 수사가 아닌 자존과 품위를 간직한 나주의 자랑이다. 어디선가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라는 호방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다시면에 들어서면 넓은 들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