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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슬로베니아

뜻 그대로 사랑스러운 수도 류블랴나…첫사랑 못 이룬 '국민 시인' 프레셰렌
알프스 만년설 흐른 블레드 호수까지…먼 햇살마저 푸르고 아름다운 이곳

 

◆사랑스러운 류블랴나

 

이 아름다움이 전쟁을 불렀던가. 발칸반도(실제 지역 사람들은 이 명칭을 싫어한다.)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레이스자락 같은 해안가에 서서 탄식했다. 이 청량한 공기에 화약 냄새를 섞는 인간들의 광포함에 신들은 노여워하며 지진이나 광풍을 보내 경고하는 것이리라.

 

류블랴나는 뜻 그대로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광장에는 신분 차이로 첫 사랑을 이루지 못한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이 영원히 그 사랑에 갇혀 그녀 율리아의 창을 바라보며 청동으로 박제되어 있다. 빈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그는 1848년 혁명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강렬한 애국심을 담아 시를 썼다.

 

'하느님께서 모든 국가를 축복하시리,/밝은 오랜 그 날 동안 일하리,/지구의 땅 위에/전쟁과 싸움은 지배하지 못하리라./간절히 보고 싶은 한,/모든 국민의 자유를/더 이상 적은 없고 이웃만 있을 것이리.' 이 시는 1989년 슬로베니아의 국가로 지정되었고 국민시인 프레셰렌의 사망일 2월 8일은 슬로베니아의 문화 공휴일이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류블랴나는 앙증맞을 정도로 작다. 1991년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전체 국토의 크기가 우리 경상북도만하고 수도는 한나절 걸어 다니며 둘러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희랍신화에서 황금모피를 얻기 위해 동방의 콜키스로 가던 이아손이 용을 물리친 곳이다. 프레셰렌광장 옆에는 트로모스트베(삼중교)가 있는데 그 중 네 귀퉁이에 날개부터 꼬리까지 섬세하게 조각된 용 네 마리가 곧 날아오를 듯 앉은 즈마이스키 모스트가 가장 유명하다.

 

인근의 성 니콜라스성당은 13세기 로마네스크양식의 목조 건물인데 잦은 지진으로 인해 1701년 바로크양식으로 재건축되어 1895년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도시의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다. 마침 미사 중이라 조용히 들어간 성당에서 둥근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목제 파이프오르간만 일별하고 나왔다. 열린 청동문에 예수와 여섯 명의 주교가 부조되어 있는데 역시 교황 바오로2세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류블랴나에 비가 내린다. 후드득, 티볼리 공원 옆 회랑 너머로 류블랴나차 강물에 비 듯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한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호젓하다니! 이마저 사랑스럽다. 푸니쿨라를 타고 류블랴나성에 오를 땐 물안개가 자욱했다. 성은 11세기에 처음 지어져 지진으로 증축을 거듭해 17세기에 들어서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터키의 침략을 막은 요새, 군사병원, 무기 저장고로 그 쓰임새가 바뀌다가 현재 류블랴나 역사박물관, 전망대, 시민들의 웨딩 홀로 사용되고 있다. 류블랴나의 여염집보다 소박한 성이어서 마음이 참 편해진다.

 

비가 그치고 안개가 걷히니 성벽 너머 발 아래 아까 걸어 다녔던 광장들과 삼중교, 카페와 성당, 중앙시장, 국립도서관들이 보인다. 스페인의 안토이오 가우디처럼 존경받는 슬로베니아의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가 국제적 명성을 내던지고 조국으로 달려와 수도 류블랴나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고 한다. 거리의 매점과 가로등까지 잠자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제자들과 함께 설계하며 건축했다니 대구경북처럼 이 작은 나라에도 애국자가 넘쳐난다. 바로크와 아르누보양식의 파스텔 색감 건물들과 동화처럼 빨간 지붕들이 그저 감탄을 자아낸다.

 

 

 

◆알프스의 진주 블레드 호수

 

슬로베니아는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 헝가리, 남쪽으로 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이탈리아와 접한 내륙국이다. 그 중에서 율리안알프스의 만년설이 흘러들어와 생긴 블레드호수는 가히 알프스의 진주라 불릴만하다. 알프스의 절벽 위에 드라마틱하게 세워진 블레드성, 개양귀비꽃이 활짝 핀 화단 옆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멍하니 호수를 바라본다. 알프스의 신은 자신의 안식처를 이 곳에 마련했구나.

 

호수 한 가운데 블레드섬으로 가려면 소란과 오염을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테레지아여제가 23개 가문에만 허가를 내줬다는 무동력 플레트나를 타야 한다. 선착장에는 엔진 없이 순전히 두 개의 노로만 배를 움직여야하는 건장한 뱃사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문의 아들과 사위에게만 전승되는 왕가의 증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진다고 한다.

 

 

알프스의 설산이 호위무사들처럼 둘러싼 호수는 밑바닥이 보일만큼 투명하고 푸르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뱃사공이 건너편 숲속의 희고 길쭉한 건물을 가리키며 '빌라 티토'를 외친다. 아, 저곳이 유고의 티토대통령 별장이구나. 정상회담을 마친 북의 김일성이 블레드의 아름다움에 취해 어린 아들 김정일과 2주일을 더 묵었다는 곳이다. 섬에서 나갈 때 한 번 들러봐야겠군.

 

블레드섬은 수성못의 밤섬 3배남짓 되는데 성모마리아 승천성당이 있다. 원래 지바여신의 신전이 있던 자린데 8세기 바로크양식 성당을 세웠다. 이 섬은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어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결혼식 장소로 각광을 받아 커플들은 성당 내부의 종을 치면서 행복을 기원한다. 섬의 99개 계단을 신부를 안고 올라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다고. 아, 그러고 보니 트럼프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도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여기서 결혼식을 올렸을까, 혼자 농담 같은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피란만의 공중 산책길

 

아드리아해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는 피란은 슬로베니아 남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유럽의 내륙국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해양 접점인 셈이다. 이탈리아 국경과 멀지 않고 바다를 사이에 둔 베네치아와 가까워 13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베네치아공화국의 일부로 속해 있기도 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슬라브문화, 게르만문화, 라틴문화의 교차점이란 상징처럼 피란의 중심가는 태어났을 때는 이탈리아인으로, 죽은 후에는 슬로베니아에 속한 피란 출신의 음악가인 쥬세페 타르티니 이름을 딴 타르티니광장이다.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광장의 동상과 생가를 비롯해 그의 이름을 딴 호텔과 기념관이 곳곳에 있다.

 

피란의 도시 성벽은 역시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각국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인접국들과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으나 21세기의 성벽은 이제 방어용이 아니라 도시의 공중 산책로가 되었다. 중세건축과 문화유산들 그리고 예외 없이 빨간 지붕들이 내려다보이는 그 길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천천히 걷는다.

 

공중 산책길에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고 멀리 크로아티아까지 보이는 햇살이 충만한 그곳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립다.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나는 한때 노후의 남은 여생을 슬로베니아에서 보내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몰타, 이스탄불, 통영, 감포 다음에 슬로베니아였다. 지금 슬며시 그 이름을 혼자 되뇌어 본다.

 

박미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