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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원선의 힐링&여행] 느티나무 아래서 농익어 가는 장독대와 명재고택

 

옛 선비들의 여름나기는 어떠했을까?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이 염소 뿔도 녹인다는 무더위를 어떻게 났을까? 바다와 산을 찾기도 만만찮을 당시의 피서지로 대청마루만한 곳은 없었을 것이다. 바람길 숭숭한 모시나 삼베옷으로 차려 입고 멋들어진 산수화 접선을 접었다 펴가며 여름 한때를 보냈지 않았나 싶다. 가끔씩 날아드는 나비를 동무삼고, 꼬리를 깔딱거리며 기둥에 달라붙은 벌들의 춤사위에 시간을 잊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전통가옥 중 하나가 충남 논산에 있는 '명재고택'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논산 명재고택'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이 지었다. 명재 윤증은 숙종 때 사람으로 소론의 거두다. '백의정승'으로 불릴 만큼 모든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1984년 12월 24일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윤증고택으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월 29일 그의 호를 따서 '논산 명재고택'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명재고택을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장독대를 보기 위함일 것이다. 수령 400여년에 가까운 느티나무 아래로 사열을 받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하게 줄지은 장독대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고택 앞마당으로 늘어선 수령 약 300여년의 세 그루 배롱나무가 솜사탕모양으로 붉은색을 토해 풍경에 격을 더한다. 배롱나무는 매년 허물을 벗는다. 따라서 선비들은 지난 일 년 동안의 과오를 훌훌 벗어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뜻에서 서원이나 고택 등지에 심는다고 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명재고택이 자리한 터를 옥녀탄금형(옥녀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고택이 자리한 뒷산은 해발 252m의 옥리봉이다. 옛날 이곳으로 선녀들이 내려왔다. 천상의 선녀를 달리 '옥녀'라고도 칭한다. 하늘의 옥녀가 지상으로 하강할 때는 산수가 수려한 곳을 고른다. 아늑한 봉우리로 내려온 선녀들이 분위기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거문고를 탄다는 명당이다. 고택의 동쪽으로는 노성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노성천의 지류인 옥천이 흘러 남동쪽에서 합쳐진다. 가히 배산임수의 길지라할 수 있다.

 

정통고택이 지닌 조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연못이다. 고택을 지을 당시 방형지(方形池)로 파고 북동쪽으로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두어 우주의 원리를 따랐다. 파낸 흙으로 낮아보였던 느티나무가 선 자리를 돋우어 보완했다. 석가산에는 배롱나무 한그루를 심어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한옥 마루 형태를 골고루 갖춘 고택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작은 우물이 있고 플라스틱 작은 관을 통해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목마른 참새도 찾고 갈증을 달래려는 물까치도 날아든다. 사람들이 뜸한 틈을 타서 급하게 목을 축이고는 자리를 뜬다. 명재고택이 갖는 특별한 물이자 진응수(眞應水:혈을 업은 산자락의 양쪽에 보이지 않게 숨어 흘러내린 물이 모인 합수처)다. 음식은 손맛도 중요하지만 물맛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물로 인해 명재고택에서는 장을 담그기 시작했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우리나라 한옥이 가지는 마루의 종류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동편 남북으로 2칸은 대청마루, 남편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서편에는 쪽마루가 있다. 대청마루와 툇마루, 누마루는 건물에 속한 반면 쪽마루는 건물에 덧대어 방을 편하게 드나들 수 있게 한다. 쪽마루는 사랑채의 서쪽 편에 있었다.

 

고택에는 다른 고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가 특징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안고지기 문(안쪽 미닫이문을 바깥쪽 여닫이 문과 겹쳐 여닫을 수 있는 문) 은 미닫이와 여닫이문의 기능을 합쳐 만들었다. 미닫이문은 열었을 때 반은 가려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닫이문의 기능을 합친다. 사랑채에 손님이 많을 경우 안고지기 문 뒤의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둘째는 '일영표준'이라는 표식이다. 정남향의 고택 툇마루 아래 축대 끝에 해시계를 두었다. '일영표준'이라 적힌 앞에 기물을 설치하여 시간을 헤아린 모양이다. 현재 일영표준에 세웠던 기물은 다른 곳에 보관 중이다. 300여년 세월 속에 마모된 옆에 새것을 만들어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된장과 간장이 농익어 가는 장독대

 

누마루 아래 축대 끝으로 작은 돌무더기를 옹기종기 쌓아 심산유곡을 표현하고 있다. 금강산에서 직접 가져온 돌로 중국의 무산, 즉 무이구곡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아래쪽 마당에는 향나무가 녹색으로 짙은 가운데 상사화 두 송이가 연분홍색으로 다정하게 피었다. 오누이인지 부부인지 오손도순 나누는 여름이야기가 정답다. 누가 우리를 보고 상사화라 이름 지었나 항변하는 듯하다. 대청마루에는 허한고와(虛閑高臥: 비우고 한가롭게 누워 하늘을 본다.)라는 액자를 걸어 옛 선비들의 청빈함과 높은 기개를 표현하고 있다.

 

경상도 지방의 고택에 비해 마당이 대체적으로 넓고 크다. 게다가 경상도 지방의 장독대가 대부분 앞마당에 있는데 반해 충청도나 전라도는 뒤란에 있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뒤란으로 돌아드니 예의 장독대가 둔덕 중간쯤에 있고 된장과 간장이 농익어 가는지 고유의 진한 냄새가 풍겨나고 옆으로 나지막한 굴뚝이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굴뚝을 두고 눈물을 뽑는 굴뚝이라 했다. 굴뚝의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높을수록 좋다. 굴뚝이 낮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통한옥은 풍수와 벌레 등에 취약점을 들어낸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연기를 쐬어 훈증하는 방법이다. 낮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집안을 골고루 감싸며 소독을 한다는 것이다. 미상불 서까래 색깔이 새까맣다.

 

고택에는 옛 시대의 고부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 즉 쪽문이자 왕의 지밀문에 해당하는 이 문은 며느리방과 사랑채 사이에 있었다. 서쪽 방에 자리한 시어머니가 문지방에 팔을 걸치고 앉아 내다보면 사랑채의 일거수일투족이 한눈에 들온다. 공부에 매진해야할 갓 장가든 아들이 공부는 뒷전으로 마누라를 찾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는지가 일목요연하다는 것이다.

 

관광객중 한 분이 "그럼 며느리는 왜 들여요? 그렇게 감시하면 아기는 언제 만드나요? 억지로 갈라놓고는 아기 못 낳는다고 소박이라니! 말도 안돼요!"하자 덩달아 "보고 또 봐도 예뻐서 보고플 땐데 옛날 시어머니들은 성질머리가 참 고약하고 가살궂네요!"하는 볼멘소리에 다들 배꼽을 잡는다. 덩달아 담벼락에 오도카니 올라앉은 청개구리조차 터지는 웃음보를 눌러 참는지 아래턱은 벌렁벌렁 아래뱃구레는 터질듯 빵빵하다.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이 접목된 고택

 

고택에는 조상들의 지혜와 과학이 산재해 있다. 동양사상에서 동쪽을 서쪽보다 중히 여긴다. 동쪽 궁궐에 왕자를 살게 하여 동궁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시어머니 방이 서쪽인 반면 며느리 방은 동쪽이다. 며느리 방은 윗방 아랫방을 나누어 미닫이로 칸을 두었다. 아랫방은 일상 생활용이며 윗방은 육아전용이다. 자녀의 나이가 7살에 이르면 공부방으로 옮긴다. 남녀칠세부동석은 남녀의 구분도 짓지만 학문에 전념할 시기가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 공부방에 든 자녀를 서방님이라 부른다. 방의 동쪽에 마당에는 작은 화단까지 두어 며느리를 배려했다는 말끝에 시어머니의 이율배반이라며 또 '큭~큭'웃는다.

 

문화관광해설사는 뒤란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보기에 따라 평행으로 또 사다리꼴로 보인다며 설명을 늘인다. 겨울철 북쪽에서 들이치는 차가운 공기는 속히 빠지게 하고 남쪽에서 불어드는 따뜻한 공기는 오래 머무르게 설계되었다며 열변이다. 안내에 따라 휴대폰을 들이밀고는 "우~와"탄성이다. 제주도 도깨비 도로 같단다. 설명 끝에 누가 뭐래도 명재고택의 비경은 눈 덮인 겨울철이란다. 느티나무가지 끝에 내려앉는 잔설과 조경용 장독대에 호빵처럼 소복하게 쌓인 눈, 서산에 걸린 구름조각에 어리는 불그스레한 태양빛이 하모니를 이루면 풍경 중의 단연 으뜸이란다.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이 함축된 고택의 기와지붕 위로 여름 햇살이 하얗게 부서진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연못 속으로 내려앉는다. 계절에 밀려 자리를 내준 여름이 연못 위서 사위어지고 있다. 여름이 농익어 가을인가? 바람 끝이 가늘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

 

특집부 weekl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