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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리스본 상조르주 성 수복한 마르팅 모니즈의 헌신

〔유럽인문학기행-포르투갈〕 마르팅 모니즈

포르투갈 리스본에 가면 가장 높은 지역에 성 하나가 보인다. 리스본 여행의 필수 방문지인 상조르주 성이다. 성 주변에는 해자가 있고, 해자 위에는 작은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뒤로는 문이 보인다. 바로 마르팅 모니즈 문이다.

 

마르팅 모니즈라는 이름은 리스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포르투갈 여행의 또 다른 목적지인 신트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호시우 역에 가다 보면 지하쳘 마르팅 모니즈 역을 지나게 된다. 이 역은 마르팅 모니즈 광장에 있다. 오늘은 마르팅 모니즈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십자군 원정대

 

“교황 성하께서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더라도 성스러운 십자군 성전으로 인정해주신다고 하셨소. 그리고 이곳에서는 예루살렘과 달리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현실적 이득도 있지 않소?”

 

1147년 6월 16일의 일이었다. 포르투갈 초대국왕인 알폰소 헨리케 1세는 포르투에서 십자군 원정에 나선 다국적 연합군을 만나고 있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스코틀랜드, 독일 등에서 모인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여러 나라 왕이 보낸 대규모 군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모인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것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 때문이었다. 지중해에 있던 기독교 도시 에데사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자 교황은 성전을 벌이라면서 각국 왕이나 영주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들은 성전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에 분개한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십자군 원정대를 만들겠다며 모인 게 다국적 연합군이었다.

 

십자군은 1147년 5월 잉글랜드 다트머스 항구를 출발했다. 그들은 곧바로 성지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쁜 날씨 탓에 6월 16일 포르투갈 해안 즉 오늘날 포르투 인근에 상륙했다. 여기서 잠시 쉬면서 물과 식량을 보충한 뒤 다시 에데사로 떠날 생각이었다.

 

처음에 다트머스에서 성지로 향한 배는 모두 164척이었다. 항해 도중 다른 곳에서 달려온 배들이 합류해 포르투에 도착했을 때에는 200여 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병사 수는 4000~5000명 정도였다.

 

 

■알리수보아를 향해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시려는 모양이군! 그들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이번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야.”

 

성지로 향하던 십자군 병사들이 포르투에 정박했다는 소식은 알폰소 1세에게 전해졌다. 그는 당시 포르투갈의 상당 지역을 점령하고 알리수보아, 즉 리스본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리수보아에 있는 이슬람군 병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십자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그에게는 하느님이 보낸 천사 일행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들을 만난 것은 페드로 피토스 주교를 보내 십자군 원정대 지도부를 설득한 결과였다.

 

“여러분이 에데사에 무사히 도착한다고 가정합시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할 겁니까? 여러분들 중에 전쟁을 무수히 겪어본 사령관이 있나요? 물과 식량은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풍랑을 만나 이곳에 좌초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으셨나요?”

 

 

페드로 주교와 알폰소 1세의 논리적인 설명과 제안은 십자군 지도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들은 내부 회의를 거친 끝에 결국 포르투갈에 머물면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일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이에 성공할 경우 에데사로 갈지 여부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대신 요구조건이 있습니다. 알리수보아를 점령할 경우 십자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 전리품을 챙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슬람군 포로들의 몸값을 저희가 모두 받도록 해 주십시오.”

 

알폰소 1세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군대는 이전보다 병력면에서 두 배 이상 강해지게 됐다.

 

알폰소 1세는 포르투갈 병사들과 다국적 십자군 병사들을 이끌고 알리수보아로 향했다. 이슬람군은 이들의 진격 소식을 듣고는 상조르주 성의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장기 농성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슬람 측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독교 군대는 포르투갈과 다국적 병사들로 만들어진 오합지졸이야. 서로 이해타산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버티면 저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거야. 시간이 우리의 편이기 때문에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어.”

 

알폰소 1세는 7월 1일 알리수보아를 포위했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리스본 포위전’이라고 부른다. 전황은 알폰소 1세의 기대보다는 이슬람 측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기독교 군대는 절벽 위에 우뚝 선 바위처럼 튼튼한 상조르주 성을 도저히 함락시킬 수 없었다. 포위전이 수개월 이어졌지만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 이 상태가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다른 나라에서 온 기독교 병사들이 성지로 떠날 거라고 난리를 떨 텐데…”

“…”

알폰소 1세의 장군 중에서 누구도 무릎을 탁 하고 칠 만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르팅 모니즈의 헌신

 

당시 전쟁에 참가한 포르투갈 기사 중에 마르팅 모니즈가 있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꼭 이겨 이슬람을 몰아내는 게 기독교도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팅 모니즈는 알리수보아 포위 작전이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을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이슬람군이 성문을 열고 튀어나와 넓은 지역에서 맞대결을 벌인다면 목숨을 던지더라도 반드시 대승할 자신이 있는데….’

 

어느 날 마르팅 모니즈는 부하 병사 10여 명을 이끌고 상조르주 성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적은 성루 뒤에 몸을 숨긴 채 기독교 병사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살펴보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상조르주 성문이 약간 열리더니 이슬람 병사 수십 명이 해자 위에 놓인 다리로 우르르 몰려나와 주변으로 흩어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르팅 모니즈는 깜짝 놀라 부하 병사들에게 물었다.

 

“저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성문을 열고 나온 거지?”

 

“이슬람 병사 여러 명이 매일 한 번씩 성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병력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했는지를 파악하고, 우리의 사기가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게 목적인 것 같습니다.”


 

 

정찰을 마친 이슬람 병사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순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마르팅 모니즈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급하게 말을 돌려 열려 있는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부하들에게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절반은 나를 따르고 절반은 알폰소 전하께 가서 ‘성문을 열었으니 어서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시라’고 전하라.”

 

부하들은 마르팅 모니즈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 헛말은 절대 하지 않고 신중하던 기사였던 만큼 그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의 말대로 일부는 뒤를 따르고, 일부는 부대로 돌아갔다.

 

마르팅 모니즈와 부하 여러 명이 성문 쪽으로 달려오자 이슬람 병사들은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문은 워낙 육중했기 때문에 조금 열린 것을 닫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문을 거의 다 닫고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만 남았을 때 마르팅 모니즈가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서둘러 말에서 뛰어 내려 거의 닫힌 성문 틈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놈들, 내가 여기 있는 한 성문을 닫을 수는 없다. 나를 죽여 몸을 토막 내든지, 아니면 성문을 이대로 두고 달아나든지 양자택일하도록 하라.”

 

깜짝 놀란 이슬람 병사들은 성문 사이에 꽉 낀 마르팅 모니즈를 칼로 난도질했다. 그는 순식간에 큰 상처를 입고 엄청난 피를 흘린 탓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병사들은 그의 시체를 빼내고 성문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갑옷이 워낙 무거운데다 뾰족한 갑옷 여러 부분이 성문 곳곳에 걸리는 바람에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어서 서둘러. 이러다가는 기독교 병사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단 말이야. 큰일 났네!”

 

그때였다. 해자 위 다리로 기독교 군대 수백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아직 닫히지 않은 성문으로 몰려가 문을 닫으려고 애쓰던 이슬람 병사들을 몰아낸 뒤 힘을 모아 성문을 열었다.

 

이어 알폰소 1세와 다국적 십자군 주력부대가 그 뒤를 따라 해자 다리를 건넜다. 그들은 상조르주 성으로 들어가 이슬람군을 도륙하고 포위작전을 승리로 마감했다.

 


 

알폰소 1세는 전쟁을 끝낸 뒤 성문 앞에 버려져 있던 마르팅 모니즈의 시신을 정중히 모셔오라고 지시했다. 그의 시신은 얼마나 훼손됐는지 얼굴은 물론 몸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알폰소 1세는 그의 영웅적 위업을 기리기 위해 상조르주 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에 포르타 데 마르팅 모니즈, 즉 마르팅 모니즈의 문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실은 전설과 조금 차이가 있다. 이슬람군이 리스본 포위전에서 패한 것은 성문을 돌파 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긴 포위작전 때문에 굶주리다 못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포위 작전 4개월 만인 9월 21일 항복했다.

 

항복 조건은 이슬람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는 대신 목숨을 살려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대는 성에 들어가자마자 대부분 병사를 학살하고 말았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