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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이원선의 힐링&여행] 백일홍 만개한 병산서원

고즈넉한 기와지붕 감싸며…붉은 배롱나무 줄지어 호위하는 듯

 

 

하얗게 늘어진 길이 뱀의 등처럼 휘었다. 햇살이 팽팽한 길을 따라 우거진 숲속으로 짝을 찾는 여름매미가 자지러진다. 헌털뱅이 버스가 꼬리에 먼지를 물면 따라가고 싶은 길이다. 풀썩거리는 뽀얀 먼지를 들이마시고 싸하게 풍기는 기름 냄새가 좋아 무작정 뒤를 따르고 싶은 것이다. 허방에 발을 헛디뎌 무릎이 깨져도 아프지 않다. 오랜만에 만나는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다. 단발머리 소녀가 책보자기를 허리에 동여 메고 깡충깡충 뛰어가는 길 같다. 옛 추억을 소환하는 아련한 길, 승용차로 흔들흔들 3Km남짓한 거리에 목적지 병산서원이 있다.

 

 

◆배롱나무 꽃속에 파묻힌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풍악서당이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세워졌다. 임진왜란을 맞아 소실된 것을 1607년 다시 지었다. 서애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이 1614년에 존덕사를 지어 스승인 류성룡의 위패를 안치했다. 현재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의 위패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병산서원은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맘 때 병산서원을 찾는 까닭은 서원을 감싸서 붉게 흐드러진 배롱나무 꽃을 보기 위해서다. 연인인 듯 부부인 듯 지나는 관광객이 "서원에 배롱나무를 왜 심는지 아니?"묻고는 "그건 말이야 배롱나무처럼 붉게 공부하며 살란 뜻이야"라며 자문자답한다.

 

그 답이 참 궁금했다. 돌아와 인터넷 검색 결과 '배롱나무 줄기의 껍데기는 매끈하다. 즉 가식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가식이 없는 순순한 그대로 살겠다는 뜻으로 심는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일명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개미 등이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면 간지럼을 타듯 떨기 때문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다.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솜사탕모양의 붉은 꽃봉오리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졌다. 흡사 서원을 에워싸서 호위하는 병사들처럼 줄지었다. 저만치 화산봉 위로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무리가 뭉실뭉실 떠다닌다. 그 아래 꽃 속에 파묻힌 서원의 기와지붕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가족은 아이를 불러 안내판에 새겨진 9개의 서원이름을 외워보라며 채근이다. 염천아래 안내판을 오가는 아이는 연신 재미있다며 병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등등 외고 있다.

 

 

◆ 병산서원의 백미,만대루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첫 번째로 맞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 예를 다시 갖춘다는 문으로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입니까? 묻자 인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한다. 즉 '나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이다. 복례문 안쪽의 양쪽 시렁에는 옛날 사대부들이 타고 다니던 사인교가 각각 3개, 2개로 나뉘어 얹혀있다. 한때는 지체 높은 양반들을 태워 꽤나 대접을 받았지만 현재는 세월에 밀려 옛 영화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조용히 사위어가고 있다.

 

 

복례문을 지나면 만대루가 고대광실처럼 눈앞으로 덩실 떠있다. 그 왼쪽으로 작은 연못 광영지가 있다. 선비들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한국 전통의 연못으로 천원지방 형식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주관이자 세계관을 나타낸 정원이다. 연못 속에 노란 수련 두 송이가 피어있다.

 

만대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푸른 절벽은 마땅히 늦은 오후에 봐야 한다'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만대루의 특이한 점은 아래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석축 위로 선 기둥이 제각각이다. 굽고 휘어진 모습이 정겹다. 늘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건축물에 길들여진 눈이 의아해하는 순간이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무더위를 식혀다.

 

만대루를 지나 돌계단을 올라서면 입교당이다.입교당 내에는 교실과 교무실에 해당하는 이 건물의 방사이로 옛날 선비들이 강학을 펼치던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대청마루 맞은편으로 동직재와 정허재, '유생들이 기숙과 개인 학습을 하던 건물'이 있고 바로 아래에는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 옆 대각선으로 정료대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당의 앞쪽 좌우 가장자리에는 매화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있다.

 

입교당의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면 자연풍으로 인해 금세 시원해진다. 이마에 구슬처럼 조롱조롱한 땀방울이 이내 숙지는 것이다. 이는 조상들의 지혜로 한옥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여름철 기온이 올라 앞마당이 자글자글 달구어지면 데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그 비워진 자리를 메우려 뒤란의 찬 공기가 들이치는 것이다. 그 중앙으로 자리한 공간이 대청마루다. 따라서 대청마루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절로 땀이 식고 시원해진다. 덤으로 만대루의 용마루를 넘어 병산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선경에 든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잊을 지경이다. 한참을 그렇게 쉬고 있던 관광객 한분이 일어나 정료대 위로 동전을 던진다. 아닌 게 아니라 정료대 위로는 이미 던져진 동전들로 그득하다. 당초 횃불을 피워 놓기 위하여 뜰에 세운 기둥 모양의 대(臺)가 제 기능을 떠나 관광객들의 기원을 받아주고 있다. 구부렸던 허리를 편 관광객이 한 번에 올라 운수대통이라며 좋아라한다.

 

 

◆달팽이 모양의 뒷간

 

입교당의 동쪽 편 쪽문을 나서자 안내판에 '달팽이 모양의 뒷간(요즘의 화장실)'이라는 건물을 마주한다. 유생들을 돕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문도, 지붕도 없이 돌담을 둥글데 감아서 만들었다. 하지만 담장의 한쪽 끝이 다른 한 쪽 끝을 가리게끔 되어 있어서 바깥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은 특이한 구조다.

 

겨울철의 그믐밤이면 할머니는 토째비(도깨비의 방언)이야기를 하셨다. 무섭다고 이불 밑에서 옹송그려 듣는데 아랫배가 싸늘하다. 형아 손을 잡고 들린 통시(변소의 방언)에 쪼그려 앉았는데 머리에 방망이를 든 토째비가 들었다. "형아 있제! 형아 가면 안 돼"하던 아이가 달팽이 속에서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나오는 길에 병산서원의 전경을 보기위해 하회구곡 중 제 1곡인 병산을 오른다. 병산은 병산서원 맞은편에 위치한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다. 안동 쪽에서 남안동I/C지나기 직전 좌회전하여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이 병산을 오르는 들머리다. 초입은 상당히 험난하여 과거에는 네발로 기다시피 했지만 현재는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한결 수월하게 오른다.

 

전망대에는 편안하게 쉬어갈수 있도록 간이의자도 서넛 설치되어 있다. 발아래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너머로 병산서원이 붉게 흐드러진 배롱나무를 거느려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여름을 고스란히 품은 물빛이 진녹색으로 푸르고 새하얀 백사장을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이 꿈결인양 싶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

 

특집부 weekl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