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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1920년대 부산은 경성과 맞먹는 영화 개봉 도시였다”

영화의도시 추적한 ‘부산영화사’ 발간
한국 첫 제작사 ‘조선키네마’ 위치 규명
BIFF와 ‘부일영화상’ 관련성도 밝혀내

 

 

 

한국 영화산업 태동기부터 서울과 함께 영화산업의 양대 축이었던 부산이 필연적으로 ‘영화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사를 통해 되짚어본 책이 나왔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최초 영화 제작사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주요 활동 장소도 처음으로 밝혀져 의미가 크다.

 

부산대 영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영화연구자, 향토사학자, 독립영화감독, 영화평론가, 기자 등 15명의 저자가 참여한 <부산영화사>(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가 출간 준비 3년 만에 빛을 봤다.

 

■1920년대 부산, 경성과 영화산업 양대 축

 

<부산영화사>는 한국에서 영화산업이 태동한 192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부산영화 역사를 정리한 첫 책이다. 책에는 부산 첫 영화제작사, 첫 극장, 첫 소극장 개설부터 부산국제단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범, 부산 영화 배급 역사, 시대별 부산영화에 나타나는 부산에 대한 고찰 등이 실렸다.

 

최초의 한국영화는 서울에서 촬영한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1919)지만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사가 설립된 곳은 부산이다. 당시에는 개별 극장 중심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민간 자본으로 만든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설립은 한국영화사에서도 큰 사건이었다. 왕필열(다카사 간조) 감독의 통속극 ‘해의 비곡’(1924)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첫 영화이자 첫 부산영화다.

 

100년 전 부산영화 환경은 지금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영화 관람열기는 대단했다. 1924년 33만 7228명이 부산에서 영화를 관람해 1인당 연 4회 관람(30쪽)했고, 1920년대 부산은 경성과 양립하는 영화 개봉도시(51쪽, 문관규)였다고 하니 영화산업 태동기부터 부산은 ‘영화 도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부산에서 일본, 서울로 이어지는 극장 배급망에서 부산이 유리했다는 측면도 한몫한다. 다만 부산에는 연기자가 부족해 서울에서 연기자(무대예술연구회)를 데려왔고, 일본 자본과 결합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가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그동안 의견이 분분했던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주소지와 주요 활동 장소도 밝혀졌다. 활동 장소는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이 당시 일본 관광 안내 책자에 나온 광고를 통해 확인했다. 무대예술연구회는 부산 영남여관에서 합숙했는데, 광고에 나온 영남여관의 주소지가 바로 부산 중구 영주동 619번지였다.

 

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5, 동아경제시보사)을 통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주소가 옛 러시아 영사관 자리였던 중구 동광동 5가 19번지(과거 영주동 5-19, 현재 중구청 아래)인 것을 확인했다.

 

‘해의 비곡’은 흥행에 성공했지만 윤백남 감독을 영입해 만든 ‘총희의 연(운영전)’은 흥행에 실패했다. 또 일본인 왕필열의 상습적인 한국 여성 배우 성희롱으로 인한 배우 나운규와 왕필열의 갈등으로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는 4편의 영화를 남기고 1년 만인 1925년에 해산하게 된다.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는 조선영화 제작을 위해 부산에 설립되어서 초창기 한국영화계를 부산과 서울로 양분하는 상징적 조직이다.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해산은 부산에서 서울로 영화중심의 이동을 상징하며 부산영화 제작의 공백이 야기되었다.”(49쪽, 문관규)

 

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행좌(幸座)가 1901년부터 영업했다는 다수의 사료를 통해, 행좌가 1901년 이전에 설립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68쪽, 김한근) 행좌와 송정좌의 정확한 위치도 고증했다.



 

 

 

■부일영화상의 탄생, BIFF 출범

 

부산은 한국 최초의 영화상인 부일영화상이 탄생한 도시다. 1958년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모임인 부산영화평론가협회(부산영평) 주도로 부일영화상이 제정됐다.

 

1940년대 말 <부산일보> 영화부가 편집국에 있었을 정도로 당시 부산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 부산영평은 박두석 당시 논설위원, 허창도(필명 허창) 문화부장을 비롯해 장갑상, 이주홍, 김일구 등이 발족했으며 부일영화상의 산파이자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윤여진, 227쪽)

 

이 때문에 부일영화상은 자연스레 부산일보사가 주최하게 됐다. 부일영화상은 TV 시대가 오면서 1973년 폐지됐다가 2008년 부활하며 매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함께 열린다. <부산영화사>는 부일영화상이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뿌리임을 역사적 맥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BIFF 개최 논의는 1994년 11월 21일 부산일보 소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출발했는데 당시 허창, 이용관, 오석근, 안수근, 이정하, 김지석이 참여해 부산영화제 창설, 부산에서의 영화 제작 가능성에 대해 토론한다. “BIFF는 부산 영화사에서 1924년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설립으로 유입된 경성의 영화인 유입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영화인 유입에 이어 세 번째 맞이하는 영화인의 부산 유입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손성우, 403쪽)

 

 

부산대 영화연구소 박은지 전임연구원은 “고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원장의 사료를 국가기록원이 보관하던 당시 일부를 열람하고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서 “현재 부산시로 사료 이관이 됐지만 연구자와 일반인 접근이 어렵고, 예산 부족으로 보관만 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책 저술을 총괄한 부산대 영화연구소 문관규 소장은 “부산이 영화도시임에도 그동안 부산영화사에 대한 본격적 정리가 없었는데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참여해 만들어낸 결실”이라며 “부산시가 홍영철 선생의 사료를 바탕으로 DB 구축, 영화박물관 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미 기자 mia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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