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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힐링&여행] 불갑사 꽃무릇

 

어둠이 용병처럼 빽빽하게 진을 친 현관문을 나서자 귀뚜라미들의 가을소나타가 G선상의 아리아처럼 감미롭다.유래 없는 긴 장마 끝에 몰아닥친 태풍들과 숙질 줄 모르는 늦더위가 초가을을 지우는가 싶어 울적한 심상이라 더욱 반가웠다. 귀뚤귀뚤! 가녀린 울음이 처량하여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을 삯이듯 망부석이라도 된 듯 우두커니 감상에 젖는다.꽃무릇으로 붉게 물들인 불갑사로 떠나본다.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불갑사

 

모악산 불갑사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佛甲面)모악리에 있는 사찰로써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암산 백양사의 말사다.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가 않아 384년(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摩羅難陀:생몰년 미상.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인도의 승려)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백제 문주왕 때 행은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하였고, 고려후기인 14세기경 중창할 당시는 수백 명의 승려가 기거하였으며 사전(寺田)이 10리(4Km)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을 겪은 후 여러 차례의 중창, 중수, 보수를 거치면서 절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어 현재에 이른다.

 

 

 

◆꽃무릇은 상사화와 달라

 

코로나19로 인해 꽃무릇 축제가 취소되고 이른 시간대라 그런지 꽃구경에 나선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주차장에서 불갑사까지는 약 800여 미터,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 한참이라 산기슭이나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는 끈끈한 어둠이 눅진눅진 배어있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서 산문을 통과하는데 산문을 받치는 중앙기둥이 특이하다. 커다란 괴목(느티나무)으로 보이는 나무의 밑동과 큰 가지만 잘라 껍질만 벗겨낸 후 옮겨다가 대들보를 받치는 형상이다.

 

꽃무릇은 외떡잎식물로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석산(石蒜) 또는 오산(烏蒜), 독산(獨蒜)이라고도 한다. 돌마늘의 꽃으로 알뿌리는 약재로 쓴다. 피는 시기는 초가을인 9월 초순경이며 높이 30~50센티미터의 꽃대가 나와 그 끝에 붉은 여섯 잎 꽃이 피고, 꽃이 진 뒤에 선 모양의 잎이 무더기로 남는다. 원산지는 일본이며 주로 절에서 많이 심는다.

 

이는 단청공사 시 독성이 있는 알뿌리를 갈아서 염료에 섞으면 병충해로부터 목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꽃무릇과 상사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공히 꽃받침이 없고 꽃과 꽃잎이 만나지 못하는 점은 같을 지라도 피는 시기(상사화는 7~8월경, 꽃무릇은 8~9월경)도 다르거니와 상사화는 분홍색, 노란색, 희색 등으로 다색인 반면에 꽃무릇은 붉은색 한 종류뿐이다.

 

 

◆꽃무릇 꽃말은 '애절한 사랑'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때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려온 젊은 여인이 있었다. 무사히 불공을 끝낸 여인이 돌아가는 찰나 때 아닌 여우비가 심하게 내렸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어느 젊은 스님의 가슴에 비에 젖은 새처럼 가여운 모습의 여인이 고스란히 들어앉았던 모양이다. 속세를 떠나 출가한 스님은 오욕칠정의 굴레를 벗어나야 함에도 수행의 정도가 어느 경지에 못 미쳐 상사병에 걸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 스님은 모든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여인만을 연모하면서 시름시름 앓더니 석 달 열흘 만에 피를 토한 뒤 죽고 말았다. 이에 노스님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이 묻었다. 그러자 이듬해 9월 초순경 스님의 무덤에서 이름 모를 꽃대가 솟아올랐고 못다 이룬 연정을 대신하듯 핏빛 붉은 꽃을 피워내니 꽃무릇이다. 꽃말은 애절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추억이다.

 

이렇게 많은 꽃무릇은 난생 처음이다. 산문 밖에서 시작된 꽃무릇 군락지는 불갑사 경내를 거쳐 조그마한 저수지의 상류까지 붉게 물들인다. 흡사 붉은 양탄자를 깐 듯, 레드카펫을 깔아놓은 듯 온통 벌겋다. 초가을에 산불이라도 난듯하고 구름 위의 선녀님들이 옥황상제의 명으로 도솔궁을 붉게 칠하던 중 들까불다 페인트 통을 발로차서 엎은 듯하다. 하여간 사방이 붉다보니 그 사이를 지나는 모든 관광객들은 내남할 것 없이 다들 작가들이고 연예인 같다.

 

피아노 건반이 머릿속에 그려졌다면 작곡가, 문장을 고루고 다듬어 노랫가락에 싣는다면 작사가, 글귀를 떠올리고 문맥으로 이야기를 엮는다면 소설가, 자연에 동화되어 들끓는 감정을 읊는다면 시인, 나풀나풀 한 마리 나비로 날고 싶다면 무용가, 카메라를 들어 꽃과 어우러진 풍경과 내면의 미소를 담는다면 사진작가, 이래저래 예술인이 아닌 사람이 없어 보인다.

 

 

◆불갑사 경내까지 물들인 꽃무릇

 

반면 사천왕문을 지나 들어선 불갑사는 정말 절간처럼 고요함을 지나쳐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스님은 고사하고 보살님의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다보니 자박자박 새벽공기를 가르는 발자국소리조차 조심스럽다. 분위기에 맞게 한껏 소리를 죽여 가며 차근차근 둘러보는 절간의 추녀 밑이나 작은 공터, 축대에 이르기까지 꽃무릇이 없는 곳이 없어 전국으로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때마침 마주한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에 따르면 명부전((冥府殿:불교 사찰에서 저승세계인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당우(堂宇))의 경우 대웅전의 오른쪽, 사람이 바라다볼 때 왼쪽에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헌데 한때는 이를 거슬러 오른쪽에 자리한 적도 있다며 귀띔이다. 이어 대웅전의 법당에 그려진 벽화 속에는 까치그림이 숨겨졌다며 말을 잇는다.

 

이는 절이 가난한 시절 중창불사 시 대웅전을 단청할 재력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단청공사를 공짜로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100일 동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모든 전설이 그러하듯 99일째 되는 날 궁금증을 가눌 수 없었던 공양주보살이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그 연유는 그간 공양주보살이 바뀌었으며 인수인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어쨌든 공양주보살이 안을 들여다보자 단청 채색에 열중이던 사람이 피를 토한 뒤 까치가 되어 날아간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잉어와 어우러진 물안개,꽃무릇

 

다음 목적지는 저수지다. 실제로 맞이한 저수지는 그리 크지 않아 한눈에도 상류가 보일 정도다. 초가을이고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상류 쪽으론 청송 주산지처럼 물안개가 희뿌옇게 어린다. 발걸음은 자연히 물안개를 찾아 상류 쪽으로 향한다. 그런 가운데 상류 쪽에서 진사 한분이 삼각대에 카메라를 거치한 채 상반신을 흔들고 팔을 휘휘 내 젖는다.

 

이유를 묻자 잉어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이리저리 몸과 손을 흔들면 잉어들이 먹이를 주는가 싶어서 모여 든다고 한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잉어와 사람간의 교감이 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후 얼룩덜룩한 점을 등에다 아로새긴 잉어 두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올라온다.

 

잉어와 어우러진 물안개, 거기에 꽃무룻을 적절히 배치하고 보니 가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뒤 늦게 카메라 앵글에 담는다고 부산을 떠는 중에 순찰을 마친 듯 잉어 무리는 예의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곧장 황금색 잉어가 등장 한다. 하지만 새벽 내내 기다렸다는 붉은색 잉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금 들린 절간 곳곳으론 아침햇살이 팽팽하다. 눈이 부실 듯 밝은 햇살 아래로 들어서자 새벽녘에 미처 못 봤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화장실 옆에서 연리목 비슷한 나무 두 그루를 만났다. 분명 연리목 같은데 안내판이 없는 걸로 보아 아닌 듯도 싶다. 하지만 다정하게 허리를 맞댄 자세가 흡사 애정행각에 빠진 연인들 같고 수줍음을 타는지 청라(푸른 담쟁이)덩굴을 빌어 치맛자락 펼치듯 덮어서 신비함을 자아낸다.

 

나오는 길은 언택트(Untact)시대를 맞아 오가는 길이 다르다. 들어가는 길이 중앙으로 난 신작로라면 나가는 길은 왼쪽 산기슭을 따라 늘어진 자드락길이다.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안내하자니 안내자도 힘들고 따르는 사람도 공히 힘겨워 보인다. 지옥의 나찰처럼 지독한 이 질병은 언제나 종식될까? '코로나19'란 감염 병이 조속한 시일 내에 마무리, 명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즐겼으면 좋겠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편집위원 lwonss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