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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열다섯에 생계 위해 고깃배 탔는데…남영동 끌려가 모진 고문

특별기획 - 감춰진 진실 ‘동해안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반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김춘삼(속초)씨

1971년 납북 1년1주일 만에 귀환, '자진월북' 씌워 2년 옥살이
한밤중 경찰들이 머리에 총구 9개 갖다 대며 보안대 잡혀가
"빨간물이 덜 빠졌네" 무자비한 고초에 결국 양팔이 굽어버려
수사기관 프락치 동료 선원이 고발,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김춘삼(65·속초시 교동)씨는 1971년, 고작 15살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 고깃배에 올랐다가 납북됐다. 귀환 후에는 미성년자임에도 고문과 폭행, 감시에 시달렸다. 그는 인터뷰 내내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가 담담히 털어놓은 과거사에는 국가에 의해 일순간 뒤틀린 삶과 슬픈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한 피해자임에도 그는 이제 아픔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납북과 간첩조작=김씨는 납북 당시 15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때 일은 다 기억난다. 잊히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김춘삼씨는 속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고깃배 선원이 됐다. 1971년 그가 탄 오징어잡이 어선 승해호는 해무가 짙던 8월30일 북한에 피랍됐다. 김씨는 동료 선원들과 억류됐다가 1년1주일 만에 귀환했다.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하지만 남한의 수사관들은 16살 어린 자신에게도 ‘자진월북'이라며 윽박지르고 멋대로 조서를 꾸몄다. 더욱이 김씨가 북한에서 금품을 받았다는 조작까지 더해졌다.

그는 “상식적으로 내가 그랬겠나. 어린 나이에 오직 고향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라고 탄식처럼 내뱉었다.

■숨통을 조이는 감시의 눈=김춘삼씨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주변인에 대한 회유, 감시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김씨의 친구가 폭행 혐의로 속초경찰서에 구속되자 경찰은 그 친구에게 김씨에 대한 정보를 주면 잘 봐줄 테니 협조하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같은 승해호를 탔던 동료 선원이 억울한 탈영 혐의로 붙잡혔을 때도 김씨는 참고인으로 불려갔다.

어느 날 밤에는 김씨가 자고 있던 방에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9개의 총구를 갖다 대고 꽁꽁 묶었다. 알고 보니 경찰들이었다. 강릉 보안대로 끌려간 그는 동료 선원들과 서울 서빙고 분실에서 고초를 겪었다. 방마다 문을 다 열어 놓고 고문하는 소리를 들려주며 김씨를 협박했다.

■두들겨 맞고 굽어 버린 팔=김씨는 또 다른 납북어부 피해자인 김모씨에 대한 참고인 조사로 서울 남영동에 끌려가 수차례 조사를 받았다. 1983년에는 수사기관의 프락치로 활동하던 동료 선원의 고발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다. “이 자식 아직 빨간물이 덜 빠졌구나”라는 말을 들으면서 무자비하게 짓밟혔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팔이 휘어지는 후유증이 남게 됐다. 결국 간첩 혐의를 뒤집어쓴 김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83년 5월부터 1985년 6월까지 2년형을 살았다.

그러나 악독한 수사기관의 감시는 끝나지 않았다. 1997년 그는 냉면집을 차려 돈을 모았고 평소 꿈이었던 새집을 지었다. 그러자 경찰이 찾아와 집을 지을 돈이 어디서 났냐며 다그쳤다. 북한 공작금이 아니냐며 대놓고 의심한 것이다.

■남북대결의 아픈 역사 극복해야=김춘삼씨는 “나이 먹은 우리 세대부터 과감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3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였다. 큰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는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겼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의 고발로 간첩으로 몰린 이후에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으나 잘못한 것이 없으니 떳떳했다.

김씨는 “나처럼 드러내고 살면서 극복한 경우도 있지만 (납북 피해자중) 여전히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이도 많고 이미 고인이 된 경우도 많다”며 “젊은 세대는 과거의 일을 잘 모른다. 우리는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살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 이제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해묵은 남북대결을 넘어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특별취재팀=이현정기자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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