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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주거빈곤, 이 아이를 구하라] "화재 흔적 지우니…가족들 다시 웃음꽃"

③집다운 집이 가져온 변화…웃음 꽃 피어나는 집, 마음껏 꿈을 꾸는 아이들
개인 공간 생기자 꿈에 한 발짝 다가가, 친구들도 집에 데려와

 

 

"가족이 함께 모여 이야기할 공간이 생겨 가족관계도 돈독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개인 공간을 가져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됐어요. 이제 친구도 집에 데려올 수 있게 됐어요."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한 주거빈곤 아동과 부모들의 얘기다. 이들은 집다운 집이 생기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매일신문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함께 주거지원 사업으로 주거환경이 나아진 주거 빈곤 아동가구 2곳을 찾았다.

 

 

◆"가족과의 시간을 되찾았어요"

 

대구 달서구의 한 빌라에 칠남매가 사는 하영(가명·17) 양의 집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막내 하정(가명·8) 양이 부리는 재롱 때문이다. 하정 양은 거실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걸 즐긴다.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재롱을 부리는 모습에 거실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여섯째 하민(가명·12) 군은 거실 바닥에 엎드려 스케치북에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뒤 자랑한다. 엄지를 치켜세우는 엄마의 모습에 하민 군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기초생활수급비로만 생활하던 하영 양 집에 2019년 12월 큰불이 났다. 요금을 내지 못해 가스가 끊겨 추위를 견디고자 집에 모닥불을 피운 것이 화근이었다. 부엌 싱크대와 장판이 훼손됐고 불을 끄는 과정에서 거실과 안방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돈이 없던 하영 양의 엄마 A(46) 씨는 집을 고칠 수가 없었다. 싱크대를 사용할 수 없어 라면이나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웠다. 욕조에 그릇을 쌓아놓고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했다. 거실 장판은 절반 넘게 훼손돼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아이들은 집 안에서도 슬리퍼나 신발을 신어야 했다.

 

하영 양의 집에 지난해 11월 변화가 시작됐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부엌엔 새 싱크대가 생겼고 거실 장판도 교체됐다.

 

가족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실과 부엌이 수리되자, 가족들은 하나둘 모여들었다. 남매끼리 싸우는 일이 줄었고, 부엌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많아졌다.

 

하영 양은 "예전엔 시멘트 바닥을 지나갈 때 신는 슬리퍼가 하나뿐이라 서로 먼저 신고 지나가겠다며 남매들끼리 싸우곤 했다. 가족이 거실에 앉아 이야기기하는 게 예전엔 어려운 일이었는데 지금은 거실 바닥에 자유롭게 눕고 앉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하민 군은 더 이상 겨울에 가족들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돼 기쁘다고 했다. A씨는 재작년 겨울 집이 너무 추워 겨울방학 만이라도 아이들을 다른 곳에서 지내게 했다. 칠남매는 겨울 동안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하민 군은 특히 집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할머니집에서 혼자 지냈던 터라 3개월 동안 엄마와 형제들을 볼 수 없었다. 하민 군은 웹툰 작가를 꿈꾸고 있다고 했다.

 

주거환경이 개선된 이후 A씨는 삶의 활력을 되찾아 한 달 전 바리스타 시험에 합격했다. 현재 직업훈련소에서 제과기술을 배우는 중인 A씨는 카페를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A씨는 "집 상태가 좋아지니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들도 맛있는 것을 해달라며 애교도 많아지고 서로 싸우는 일이 적어지니 스트레스도 거의 없다"고 했다.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갔어요"

 

 

대구 동구 팔공산 인근 단독주택에서 거주하는 건우(가명·16) 군은 학교 축구부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다. 친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지만 건우 군은 단 한 번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

 

방은 자전거, 책장, 서랍장, 각종 집기로 가득 차 있어 기지개를 켜는 것조차 힘들었다. 창문이 없어 채광과 통풍이 잘 이뤄지지 않아 악취가 났다. 외풍이 심하고 단열이 안 돼 겨울이면 화장실에서 덜덜 떨며 씻어야 했다. 이 때문에 도저히 친구를 집에 초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건우 군은 지난해 주거환경 개선사업 덕택으로 친구를 집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달라진 자신의 방에 자신감이 생겼다. 개선 공사 이후 건우 군의 방은 체력단련실로 바뀌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리버풀FC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처럼 되는 게 꿈이라 체력 단련을 중시했지만, 비좁은 방 안에선 팔굽혀펴기할 공간마저 없었다.

 

이젠 방안을 가득 채우던 잡동사니 대신 러닝머신 등 운동기구가 들어왔다. 창문을 내서 방안이 훨씬 밝아졌고 창고로 쓰던 옆방과 합쳐 내부도 넓어졌다. 화장실의 벽지·장판을 교체했고, 샤워시설도 설치됐다.

 

건우 군은 "비가 오거나 너무 더운 날에도 집에서 운동을 할 수 있게 돼 좋다. 특히 여름엔 땀 때문에 자주 씻어야 하는데, 이제 샤워기가 생겨 편하다"며 "무엇보다 내 공간을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좋다. 진짜 축구선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윤정훈 기자 hoon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