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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주거빈곤, 이 아이를 구하라] ③좁은 세상 속 전쟁터, 직접 가보니…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대구 주거 빈곤 아동가구 2곳 심층 인터뷰
좁은 공간 서로 차지하려고 가족에 삿대질
화장실에서 이성 가족끼리 같이 씻어
오래된 집으로 몸 다치고, 좁은 책상에서만 생활

 

 

열악한 집은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아이들은 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형제자매와 경쟁한다. 습기가 가득해 곰팡이가 가득한 집은 아이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협한다. 매일신문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함께 주거빈곤 아동가구 2곳을 찾았다.

 

 

◆좁은 공간이 부른 '남매전쟁'

 

"만지지 마, 내 크레파스야!"

 

대구의 69㎡ 남짓한 한 임대아파트. A씨 부부와 육남매 보미(가명·22·여), 해미(가명·19·여), 진영(가명·17·남), 주원(가명·11·남), 지원(가명·7·여), 정은(가명·3·여) 여덟 식구가 사는 좁은 공간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책상을 차지하기 위해 육남매는 '전쟁' 중이었다.

 

육남매에겐 개인 방과 책상이 없다. 아이들은 학습지를 풀 때 하나뿐인 공부용 밥상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인다. 한 명이 겨우 사용할 크기인 밥상이 육남매의 공용 책상이다.

 

엄마 A(44) 씨는 집안에 흩어진 남매 물건을 찾아주다 하루가 다 간다고 했다. 아이들의 물건은 거실 옷장 위까지 빼곡히 쌓여 있었다. 육남매는 자신 물건을 모아놓을 공간이 없고, 곳곳에 제멋대로 둔 학용품들은 금세 뒤섞인다. 이는 또 싸움의 원인이 된다. 누가 자신의 크레파스를 가져갔느냐고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매번 중재자로 나설 수밖에 없는 엄마 역시 스트레스가 크다.

 

 

 

남매들의 싸움은 하나뿐인 화장실로도 번진다. 여자 아이들이 욕조에서 샤워를 하는데, 볼일이 급한 남자아이들이 억지로 들어오려다 고성이 오간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힘들다. 육남매의 옷은 모두 거실 옷장에 있다. 사춘기 아이들은 옷을 꺼내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옷을 입거나, 화장실에서 입고 나온다.

 

성별 구분 없이 한 공간에서 자야 하는 것도 문제다. 여덟 식구는 네 명씩 두 방을 나누어 잠을 잔다. 성인과 사춘기 아이들은 사생활을 포기한 지 오래다.

 

A씨는 "방이 3개만 돼도 남녀를 분리할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남자애들 중 셋째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넷째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둘 다 예민한 시기여서 프라이버시 문제가 여러 모로 걱정이다. 이웃들도 왜 남자애랑 여자애 따로 안 재우느냐며 손가락질한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은 아이들의 마음만 다치는 게 하는 것이 아니다. A씨 집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빨래건조대였다. 빨랫줄은 방 이곳저곳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축 늘어진 빨래들을 손으로 헤집으며 집을 돌아다녔다.

 

빨래 널 공간이 부족해 세탁을 제때 못하고, 결국 위생에도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의 침대 시트와 이불, 베개는 새까맣게 때가 묻어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다 흘린 얼룩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A씨는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없던 '피부병'이 생겼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냉장고는 제기능을 못한다. A씨는 "혹시나 냉장고에서 뭘 꺼내 먹고 탈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문지방만 30㎝, 발 헛디뎌

 

세영(가명·17) 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다. 매일 밤 술을 먹는 아빠와 집을 나간 엄마로부터 방치된 세영 양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할머니 집은 지은 지 50년도 더 됐다. 방이 3칸이 있는 넓은 집이지만, 워낙 오래돼 천장이 기울었다. 화장실은 외부에 있고, 문지방이 높아 세영 양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 어렵다.

 

할머니 B(74) 씨가 세영 양의 다리를 어루만졌다. 얼마 전 세영 양이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문지방을 넘다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쳤던 것이다. 문지방 높이는 자그마치 30㎝. 세영 양은 한동안 깁스를 했다.

 

화장실이 멀다 보니 세영 양은 좀처럼 씻는 게 힘들다. 특히 겨울엔 화장실 난방이 안 돼 씻는 걸 포기 한다. 양치까지 제대로 하지 않아 치아가 부식돼 갑자기 이가 빠지기도 했다. 한번은 세영 양의 발목 쪽에 검은색 두드러기가 났다. 병명은 잘 씻지 않아 피부 각질에서 일어난 '피부병'이었다.

 

 

세영 양의 생활 반경은 좁은 책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할머니에 대한 애착이 심해서다.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일삼고, 할머니가 외출하면 화를 내며 폭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가 세영 양의 마음을 병들게 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주택에 마구잡이로 놓인 가구나 식기가 할아버지의 폭력 도구가 됐다.

 

책상과 떨어지지 않는 세영 양은 하루가 단순하다. 좁은 책상에서 공부와 게임, 식사까지 모든 걸 해결한다. 그러다 몸무게는 걷잡을 수없이 늘었다. 얼마 전 새로 산 의자가 세영 양의 체중을 견디지 못해 부서졌다. 등받이 없는 원형 의자를 임시로 쓰고 있지만, 세영 양의 몸에 비해 작아 요즘은 침대를 의자처럼 쓰고 있다.

 

세영 양은 친구가 거의 없다. 세영 양은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도 없다. 집이 낡아 놀림을 받을 것 같아서다.

 

할머니 B씨는 "세영이는 나에 대한 의존이 너무 심하다. 내가 없으면 목욕탕에도 잘 가지 않는다. 친구를 잘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있어 걱정이 크다. 밥도 제때 안 먹고 자기 책상에 앉아 야식만 먹어 체중이 불어난다"고 말했다.

 

 

 

배주현 기자 pearzoo@imaeil.com 윤정훈 기자 hoon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