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이라 평가받는 궁예 철원서는 친근한 이미지 통일신라 대표 철불 제작 철원주민 1,500명 힘보태 석탑과 느티나무 세그루 6·25전쟁중 기적적 보존 영월 세달사에서 나온 궁예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염원을 읽는 민중들의 미륵불을 자처했다.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정하고,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강원도가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새로운 시대를 연 지역민들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상을 품어줄 지도자 궁예 행군에 동참했다. 궁예왕은 왕궁의 도성을 흙으로 지었다. 내성 4,370m, 외성 577m 규모로 담장을 낮춰 백성들과 소통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궁예를 무자비한 폭군의 이미지로 만들었지만, 철원 곳곳에는 친근한 궁예왕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다. 왕건의 쿠데타로 밀려난 궁예왕은 궁에서 쫓겨나 전투를 치르며 도망을 가는 동안 지역 곳곳에 이름을 남겼다. 명성산은 궁예왕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음을 터뜨린 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궁예 부하들이 흐느껴 울어서 생긴 느치계곡, 궁예왕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넜다는 한탄강 여울 왕
물 밑 세상에 살다가 육상으로 터전을 옮긴 하루살이는 몇 시간에서 길면 1주일까지 산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살이 생애를 들여다보면 알-애벌레-아성충-성충으로 구분된다. 이 기간을 모두 합하면 하루살이의 생애는 훨씬 길어진다. 애벌레 시기는 1~3년 정도로 이 기간 동안 50번 정도 탈피 과정을 거쳐 아성충이 된다. 그러므로 하루살이가 이름처럼 하루만 살진 않는다. 하루살이같이 짧은 생애주기를 갖고 있는 생물이 인간처럼 자기보다 긴 생애를 사는 생물의 삶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류가 식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수준도 하루살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식물은 지구 행성에 35억 년 전에 도착해 지구 지표면을 99.5~99.9% 점유하고 있다. 사실상 지구의 주인은 식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생존하는 수명 또한 100년 정도인 인간에 비해 수만 년 이상 살고 있다. 그것이 식물과 사람 중 어떤 생물이 더 진화했는가?라는 질문에 인류라고 답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몸의 95%가 제거돼도 재생 능력을 갖춘 식물이 진화의 최강자가 아닐까? 인간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주변 사물을 인식하고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 왔다. 식물도 이런 다섯
사명대사의 호국정신 깃든 건봉사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과 싸운 명소 신분 차별 없이 처사 사리탑도 모셔 신라때 세워져 1878년 산불로 타격 불이문 6·25전쟁때 남은 유일 건물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팽나무 불이문 옆에 서 있어 함께 화마 피해 동해안 지역서 유일한 보호수로 지정 박수무당 유래 신과 인간의 가교역할 제주해녀들과 함께 고성까지 올라와 강원도는 남과 북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행정명이다.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자치단체인 고성군, 철원군, 김화군 역시 둘로 나뉘어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분단은 혈육들을 갈랐고, 지명도, 땅도, 생각도 갈랐다. 휴전선 아래 고성군 끝자락에 건봉사(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라는 절이 있다. 과거 이 사찰은 금강산 자락에 있는 첫 번째 사찰로 설악산 신흥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금강산 관문에 위치해 있어 여행객들에게 휴식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1544~1610년)가 이곳에서 승병을 모아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호국정신이 깃든 명소다.
고성 만경대 조선 유람문화 이끌 시·그림 단골 소재 작품 '청간정' 속 만경대 소나무 중 1그루 233년간 우뚝 양양 낙산사 의상대 주변 나무들도 그림 속 수형 유지 삼척 죽서루 양옆으로 회화나무·말채나무 서있어 조선 최고 도화서 화원 그려낸 나무 문화적 가치 커 전문가 "보존 필요 스토리텔링 통한 유산 만들어야" 고성, 양양, 삼척에도 김홍도 나무가 있다. 김홍도 나무는 관동팔경으로 이름난 고성 청간정 만경대, 양양 의상대, 삼척 죽서루 주변에 있다.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청간정 만경대의 김홍도 나무는 만경대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다. 김홍도의 그림 '청간정' 속 만경대는 2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지만 현재는 오른쪽 두 번째 소나무만이 233년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청간정은 조선의 유람문화를 이끌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곳으로 특히 바다 인근에 솟아오른 만경대는 시와 그림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 명소다. 그러나 현재 만경대는 군부대가 1953년부터 68년간 위치해 일반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만경대는 관동팔경의 대표적 명승으로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 주변의 소나무 2그루도 김홍도가 그린 나
이 땅 지켜온 토종과일나무 주민 신목삼아 매년 서낭제 가치 높아 천연기념물 지정 밑동에 감나무 가지 접붙여 크고 맛있는 감열매 키워내 동의보감 딸꾹질 특효 기록 현대인에게 고욤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무척 낯설다. 그래서 고욤은 감나무 종류의 하나인 토종 감이라고 하면 쉽게 알아듣는다. 토종식물이 대부분 그렇듯이 과실에 비해 씨앗의 크기가 커 먹을 게 별로 없다. 자질구레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큰 것 하나만 못하다는 의미를 품은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 또 정반대의 의미인 '고욤이 감보다 달다'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 토종은 작지만 실속이 있는 존재로 이 땅을 지키며 살아왔다. 도토리, 밤, 고구마, 감자처럼 구황작물의 하나로 인기가 높던 과일이다. 굶주림과 질병을 이겨낸 조상들의 지혜를 담은 '구황촬요(救荒撮要)'는 '다 익은 고욤을 대추와 함께 쪄서 씨를 발라내고 한데 넣어 찧어서 먹으면 식량을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두 나무의 외형은 거의 같다. 고욤나무는 가지에 큼직한 감을 매단 감나무와는 달리 손톱 크기만 한 열매를 가지마다 달고 있다. 고욤 열매를 항아리에
지정면 안창리 마을 원주 6호 보호수 김제남 신도비와 나란히 수백년 동행 마을서 가장 큰 키 수려한 외형 눈길 원주 남한강 주변은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등 폐사지가 여러 개 있다. 과거 고려나 조선 시기 강은 교통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됐다. 강을 따라 물건과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을 중심으로 한 경제, 사회, 문화가 발전하게 됐다. 강은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류에서 비옥한 토질을 만들며 생명과도 같은 곡식을 키웠다. 삼각주가 만든 대지 위에서 만들어진 곡식은 사람을 길러냈다. 곡식은 수만 번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졌고 땅 위의 퇴적물처럼 사람들의 노고가 쌓여 지역인재를 만들어냈다. 기름진 땅이 만든 지역의 인재들은 국가의 부름에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라진 사찰은 수만 년 지나오면서 지역민의 땀과 정성이 모여 만든 공동체였다. 각각의 절터는 느티나무를 키우고 있다. 천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우리 곁에 온 나무들이 과거 영광을 스쳐가듯 보여준다. 이곳은 불교 국가인 고려의 국사를 역임한 스님들과 관련이 있다. 원주는 고려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라는 국가를
조선 왕실서 보호한 황장목 바위에 벌채금지 암각 남아 높이 15m 수령 400년 달해 여러갈래 줄기 풍치 돋보여 소나무는 소낭구(고성, 홍천), 소낭기, 신주(강릉), 솔나무(강릉,삼척), 솔잎(삼척), 송구대(태백), 송굿대, 송굿잎, 솔(삼척), 송귀나무(화천), 송기(강릉,양구,인제), 송진(강릉,동해,평창), 송피(태백), 송화가루(평창)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한자문화권에 있던 중국과 조선시대는 최고급 토종소나무를 황장목이라고 불렀다. 강원도는 왕실에서 사용하려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은 황장금표가 10여개 있다. 그중 하나가 인제군 북면 한계리 치마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다. 운흥사지 터로 불리는 이곳은 원통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 한계령 송어마을로 들어서서 도로 끝에 위치하고 있다. 차를 이용해 갈 수 있는 도로까지 이동해 주차를 한 뒤 걸어서 30여분을 가야 한다. 웅장한 담장으로 보이는 석축들이 보인다. 석축을 돌아가면 건물터는 밭으로 변해 있다. 밭 끄트머리에 또 다른 석축이 있다. 아마도 건물이 여러 채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석축 사이에 황장금표가 있다. 금표 앞은 석탑이 쓰러져 널려 있다. 수풀 사이에
박 화백 작품 속 단골 소재…240년 추정 공립보통학교 내려다보이는 뒷산 위치 높이 16m 고목 지금까지 자라고 있어 #나무를 사랑한 화가 자연의 일부분인 우리는 너무 쉽게 자연을 잊고 살며, 삶을 영유하는 에너지도 자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이번 전시는 자연을 표현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림, 도예, 조각, 전각, 사진 등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자연의 미를 보여주었다. 전시 이후 많은 분이 전시평을 보내왔다. 전시 기획자의 마음을 읽은 시민들의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내년에도 전시를 이어 가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고 자연의 품속을 파고드는 작가를 적극 찾아 나서야겠다. 근현대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라고 하면 박수근(1914~1965년)을 뽑곤 한다. 양구 출신으로 춘천에도 그의 자취는 많이 남아 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고향집에서 보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빨래하는 아낙, 아이 업은 누이 등 어릴 적 향수를 일으킨다. 가끔 나무가 그림 안에 등장하는데 겨울나무처럼 보인다. 나뭇잎은 벌써 떨궈냈는데 나무줄기에 나뭇가지들이 위를 향해 손을 벌리듯 서 있는 나무.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는 아
홍천향교 1635년 현 군청인근에 자리잡아 6·25전쟁 중 사라졌지만 보호수 살아남아 양쪽 수령 304년 높이도 같아 균형미 압권 신목의 위엄 속 알록달록 단풍 반전미까지 향교는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이다. 공자를 비롯한 뛰어난 유학자에게 제사를 올리며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홍천향교는 중종 26년(1531년)에 두촌면 철정리에 창건됐다가 1560년 화촌면 내삼포리로 이전했다. 1595년 홍천읍 희망2리로 다시 옮겼으며 현재의 자리는 1635년에 자리 잡았다. 모든 건물과 자료가 6·25 전쟁 때 사라졌으며 1957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향교의 구조는 대략 제사의 기능을 갖는 대성전, 강론하는 명륜당,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은 유학을 발전시켜 학문의 영역으로 쌓아 올린 중국의 성현 공자, 맹자, 주희를 비롯한 15현과 우리나라 설총, 최치원,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 18선현으로 33분의 성현이 모셔져 있다. 지역인재 발굴의 산실인 향교는 동재와 서재에 학생들을 모집해 강학을 했다. 조선은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했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실시하는
600여년 된 느티나무·경내 향나무 주변 연못과 어울려 주민 쉼터 역할 1800년대 불교관·그림 세계 담아낸 귀한 사료 극락전 벽화 또다른 볼거리 도문화재 132호로 지정된 해우소 당시 생활상 반영하는 타임머신 #단종을 기리는 사찰의 나무 천년사찰의 기풍을 갖추고 있는 보덕사는 668년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발본산 지덕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1161년(고려 17대 인종 32년)에 설헌선사와 원경국사가 극락보전, 사성전, 염불안, 고법당, 침운루 등을 증건했다고 전해진다. 1457년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되자 노릉사로 바뀌게 됐으며, 후에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현재의 이름인 보덕사로 바뀌었다. 지금은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에 속해 있다. 비구니 스님이 불법을 닦고 있는 고즈넉한 사찰이다. 보덕사에 가면 꼭 봐야 할 볼거리가 3개 있다. 첫 번째는 사찰 입구에 늘어선 느티나무와 향나무, 두 번째는 극락보전 안의 불화, 마지막으로 해우소다. 사찰 입구 일주문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느티나무는 사찰의 세월만큼이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느티나무는 600여년 된 나무(영월군 보호수 24호) 두 그루와 450여년 된 나무(영월군 보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