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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가고 싶은 곳]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

아이 품고, 웅크리고…절명의 순간 고스란히 박제
부유층 휴양 즐기던 작은 로마…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잿더미

 

◆폼페이, 즐거운 나날들의 기억

화산재가 묻은 듯 폼페이의 희미한 도판에는 첨필 끝을 아랫입술에 댄 여인들이 몇 있다. 연인에게 보낼 시를 쓰려는 것이었을까. 빛나는 눈망울과 왼손에 든 서판을 묶은 리본이 아직도 선명하다.

디오니소스와 세멜레의 입문의식으로 글을 읽는 아이를 자애롭게 지켜보는 어머니와 하인을 대동하고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건네는 지체 높은 귀부인, 화장하는 여인, 빵가게 안주인, 점을 치는 노파, 폼페이에 가기 전 내가 본 도판 속 AD 1세기 고전 세계 여인들은 모두 그렇게 아름답고 당당했다.

 

뜨거운 여름 한낮, 첫 대면한 폼페이는 불그스름한 잿빛을 띤 황폐함 그 자체였다. 바실리카 앞 푸르스름한 포석(鋪石)이 깔린 도로의 수레바퀴 자국, 노예가 모는 이륜마차가 낸 것일 터였다. 도로 옆엔 파묻힌 도시에서 발굴해 낸 지붕 없는 집들이 무심하게 햇빛을 받으며 늘어서 있다.

 

 

단단한 벽돌 담장의 빵공장 마당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곡식을 빻는 맷돌과 돌확들이 방금 사용한 것처럼 반짝인다. 뒤쪽 저 가마에서는 2천년 전 8등분을 한 캄파니아식 둥근 빵을 구웠으리라.

 

해시계와 물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으로 폼페이 시민들은 출근을 하고 목욕탕엘 가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시합을 보고 연인을 만나거나 술집에서 만나 회식을 하고 투계 도박도 했을 것이다. 지대가 높은 곳엔 아폴로, 비너스, 아우구스투스, 머큐리, 포세이돈 신전이 늠름하게 서 있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신전도 몇 있었다는데 구분이 되지 않는다.

코린트양식의 기둥머리를 한 대리석 기둥들 사이로 벽면의 쪽빛이 희미하다. 그 아래 중앙대광장과 극장, 술집, 중앙대목욕탕, 쿠리아회와 아본단차 거리의 상점들, 거대한 전원풍의 저택들과 정원도 우아하다. 폼페이는 부유한 사람들이 선호한 작은 로마였다.

 

 

◆폼페이, 최후의 날

폼페이 최후의 날은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시골 풍경에 심취된 사람들이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던 서기 79년 8월 24일 새벽에 느닷없이 다가왔다. '갑자기 땅이 심하게 흔들리며 벼락이 쳤다. 저 멀리 베수비오산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재를 뿜더니 불덩어리가 마치 우박처럼 도시 위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도달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가공할 위력으로 폭발했고 아름다운 폼페이는 인근의 헤르쿨라네움과 스타비아이와 함께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탈리아 기행으로 이곳에 들른 괴테는 이 재앙을 '후세에게 기쁨을 준 비극'이라고 했다. 하지만 심약한 후세인 나는 아이를 품에 감싼 여인과 기왓장으로 쏟아지는 불씨를 막으려던 노예, 가족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내 그리고 두려움 속에 광물질이 되어버린 동물들의 형상을 보며 소(小) 플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글을 읽으며 몸서리를 친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베수비오화산은 여기저기 입을 벌리고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그것은 더욱 끔찍했습니다. … 아비규환 속에서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사흘 뒤에야 암흑이 걷히고 일식 때처럼 검은 납빛을 띠고 있었지만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아저씨 대(大)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의 저자이며 해군제독이었다.

 

 

◆폼페이를 되살려낸 고고학자들

1748년 그리스 문학교수 마르토렐리가 프레스코 벽화와 로마시대의 투구, 기름 램프 그리고 동전을 찾아낼 때까지 사람들에게 폼페이는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치비타로 바꿔 불려지던 그곳에서 약간의 금과 은마저 발견하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보물 사냥꾼들이 폼페이로 몰려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보물찾기로 변질된 폼페이 발굴은 나폴리당국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죗값을 치르기 위해 발굴 작업에 동원된 죄수들은 작은 유물들을 자신의 주머니에 숨기기에 급급했다. 어떤 유물이 어떻게 유실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폼페이의 유물은 하나 둘 사라졌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어지러웠고, 폼페이를 필수적으로 둘러보는 브루조아들의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지만 공공연한 폼페이 보물사냥은 1860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에마누엘레2세가 젊은 고전(古錢) 연구가 피오렐리를 발굴책임자로 임명할 때까지 횡행했다.

 

그는 폼페이 발굴에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해 정확하게 발굴일지를 썼고 지역과 구역을 나눠 고유번호를 매겨 체계적으로 발굴을 수행해 나갔다. 이 방법은 폼페이의 70%까지 발굴 중인 현재까지 적용되고 있다. 피오렐리는 또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을 고안해 내어 폼페이 사람들이 죽어간 절명의 순간을 고스란히 재현해 냈다.

이후 160년 동안 마이우리 등 고고학자들의 열정어린 작업으로 우리는 스쿠올레 거리와 세모꼴 광장 사이를 걷고, 원형 경기장 계단에 앉아 고대 폼페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대문호 괴테의 잠언이 이런 큰 뜻이었을 텐데 내가 오독했다는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폼페이의 두 번째 죽음

폼페이는 BC 10세기 어부들과 농부들로 형성된 소공동체에서 잿더미에 파묻힌 그 날까지 오스크, 그리스, 에투루리아, 삼니움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지배당하며 번영해왔다. 화산 폭발 이전인 62년에 지진도 겪지만 로마인들의 사랑을 듬쁙 받는 휴양과 기쁨의 도시로 오래 평화로웠다. 귀족들과 부유한 시민들은 자신의 집을 환상적인 그리스풍 박물관처럼 꾸미기를 좋아했다.

프레스코화가 가득한 신비의 별장, 덤불숲과 연못이 있는 정원을 가진 목신(牧神)의 집, 코린트식 응접실이 있는 은혼식의 집, 기둥이 둘러싸인 안마당이 있는 황금빛 큐피트의 집, 검투사의 숙소, 화산 폭발 직전까지 이시스 신전의 사제들은 예식을 위해 제단을 준비하고, 노동자들은 신비의 별장 회랑에 회반죽을 칠할 구획을 할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이후 작은 로마답게 잘 구획된 도로의 끝마다 웅장하던 문들은 그을린 돌쩌귀의 명문으로만 남았고 호화로운 영묘는 멀리 둔 채 폼페이 사람들은 폐허와 함께 멸망의 순간과 절망의 표정으로 고스란히 박제되고 말았다. 잡초와 포도넝쿨이 뒤덮인 저 바닥에 팔꿈치를 땅에 괴고 일어나려는 자세로 굳어버린 사내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가족들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워 아이를 감싸거나 엎드리고 웅크린 그 얼굴들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규제로 인해 날이 갈수록 둘러 볼 수 있는 폼페이 유적은 점점 줄어든다. 기름진 땅, 식물의 번식과 습기, 문화 파괴주의, 여행자들의 끊임없는 발길(가장 심각한 오염원이 인간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로 폼페이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있으니 오히려 복원작업마저 중단하여 그곳을 구하자는 구호도 거세지고 있다.

폼페이가 다시 오랜 시간 우리에게서 사라진 도시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일 터. 발굴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박미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