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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영원한 여행’ 돕는 첼리스트…죽음 통해 삶 돌아보다

(39) 굿바이
첼로 연주자였던 주인공, 일자리 잃고 납관사로 취직
비천한 직업으로 생각…온갖 죽음 대면하며 변해가
아버지의 시신과 조우…부친의 심정 느끼면서 눈물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지는 내 운명이로다. ‘나니와’의 영화는 꿈속에 또 꿈이던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자신의 수명까지 단축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옛 이름 ‘나니와’)의 거성에서 6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 남긴 유언시다. 인생을 달관하고 초연하게 삶을 마감하는 듯한 분위기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삶의 끈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범부의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죽었다. 사무라이 할복이나 가미카제 자폭처럼 의연함으로 미화되는 비장미 따위도 전혀 없었다.

대체로 인간은 죽음 직전까지도 그 상황을 부정하며 반드시 더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하는 듯하다. 허나 일본인들에겐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선 체념하고 순응하는 자세가 보편적인 것 같다. 칼과 창으로 서로를 살육하던 백 년 이상의 전국시대가 있었고, 자신들이 자초했던 태평양 전쟁과 두 차례 원폭 투하가 있었다. 자연재해는 역사와 관계없이 그들 앞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런 역사와 지리적 숙명을 통해 남들보다 더 많은 죽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인들이다. 죽음으로 모든 인연이 끝난다면 너무 가혹하다. 현세의 인연의 끈이 다음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죽음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에 깃들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2008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굿바이(Good & Bye)’는 일본인들의 이런 죽음관을 살짝 엿보게 해주면서 몬트리올 영화제 그랑프리 등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과 호평이 이어졌던 수작이다. 원제목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는 ‘떠나보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저 세상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망자들을 보살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첼로 연주자인 주인공 다이고는 소속돼 있던 오케스트라가 해체되면서 하루아침에 도쿄에서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구직을 알아보던 어느 날 ‘고수익 보장. 초보 환영’이라는 내용의 ‘여행 도우미’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여행 가이드를 기대하며 면접은 즉석에서 합격했지만 광고문의 ‘여행’이란 단어 앞에는 ‘영원한’이란 수식어가 있었어야 했다. 저 세상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망자들을 염습(殮襲)하는 납관사(納棺師)로 취직한 것이다. 

첼로를 연주하던 품격 있던 두 손은 망자들의 시신을 어루만지는 도구로 변했고, 음악 예술가의 아내는 비천한 직업의 가족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부부가 겪는 갈등과 서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랑의 확인이 영화의 큰 줄기이고, 다이고가 납관사로서 온갖 죽음과 대면하며 겪는 애환과 깨달음은 영화의 중요한 가지들이다. 영화의 뿌리는 아버지 시신과 조우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난다. 예기치 않게 확인되는 사랑이 관객들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다이고 스스로도 비천한 직업이라 느꼈던 납관사의 그 일은, 그러나 영화가 전개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망자의 시신을 정결하게 닦고 새 의복을 갈아입히는 염습과 그 시신을 관에 넣어 누이는 납관의 과정은 영화 속 대사처럼 경건하고 장엄하다. ‘이승의 피로와 고통, 번뇌를 씻어냄과 동시에 저승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목욕이자, 차갑게 식은 망자를 치장하여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는 행위’인 것이다. 

남편의 직업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아내도 결국에는 ‘제 남편은 전문 납관사거든요.’라고 말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사뭇 감동적이다. ‘누가 날 시험하는 걸까? 어머니를 못 지켜드린 벌인가?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라며 스스로 비관에 빠졌던 다이고는 염습과 납관의 신성함에 동화되면서 점차 자아를 찾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는 각기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수많은 유형의 죽음들이 있었다. 
 

 

쓸쓸한 변사체로 발견된 독거노인, 손녀들의 토시 양말을 신고 싶어 했던 할머니, 부모 속을 썩이던 트랜스젠더 여학생, 이마에 딸의 립스틱 자국을 흠뻑 바르고 이승으로 떠나는 아버지……, 급작스럽게 혹은 천수를 누리고 죽어간 그 모습들은 각기 달랐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모두 같았다. 납관사의 절도 있는 손길에 의해 정성껏 닦여지고, 맨살이 보여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혀진다. 마지막의 신성한 그 의식으로 인하여 영화 속 모든 망자들 모습은 똑같아진다. 이승에서의 번뇌는 사라졌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는 평온만 남는다. 망자의 가족들에게도 떠나보내는 슬픔이 안도로 바뀐다.

“죽음은 문이야. 죽는다는 건 끝이 아니야. 죽음을 통과해 나가서 다음 세상을 향하는 거지. 그래서 문이야. 난 문지기로서 많은 사람을 배웅했지. ‘잘 가세요. 또 만납시다.’”

화장터 아저씨가 친구의 화장을 치르며 하던 말속에 일본인들의 죽음관(觀) 또는 영화 속 망자와 그 가족들의 기대가 함축되어 있다. 

‘너무나 맛있단 말이지, 미안하게도.’ 

방금 염습을 마치고 온 그 손으로 너무나 맛있게 닭고기를 뜯어 먹는 납관사들의 대화 속에도 비슷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의 죽음과 희생을 통하여 생존한다. 영화 속에선 여러 인물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행위가 많이 강조되는데, 한쪽의 죽음이 다른 쪽에선 삶의 연속으로 이어진다는 함의가 엿보인다. 죽은 자를 통하여 보수를 받고 생계를 유지하는 다이고의 처지도 같은 의미다.

카페를 운영하다 여종업원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이후 소식을 끊은 아버지였다. 어릴 적 일이라 다이고에겐 뚜렷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우편 소식을 접했지만 다이고에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우편에 나온 주소지로 찾아가 아버지 시신과 무덤덤하게 조우한다. 

자신의 행복만을 좇아 고향과 가족을 버린 그 아버지는 실은 객지를 전전긍긍하며 초라하게 살다가 이렇게 쓸쓸한 시신으로 남아있다. 강물을 거슬러 회귀하는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서 죽고 싶었을 그 심정이, 시신을 염습하는 납관사 아들의 눈물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누구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도 하고 또는 자신이 먼저 배웅받기도 한다.’는 예고편 카피가 다시 떠오르는 작품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