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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사람 싫어 산으로 간 여자, 사람에게 구원 받다

(38) 랜드
남편과 어린 아들을 잃고 도시를 떠나 오지서 생활
사냥꾼 남자의 도움으로 치유받고 삶의 희망 되찾아
소중한 사람 보내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구원 이야기

 

‘길을 잃거나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위치와 관계의 무한한 범위도 이때부터 깨닫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전 ‘월든(Walden)’ 8장에 서술된 내용이다. 19세기 중반에 20대 청년이었던 소로가 미국 매사추세츠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3년 가까이 홀로 살며 알게 된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17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한 여인은 미국 중부 내륙 와이오밍주의 산속 오두막에 3년 이상을 홀로 살았다. 문명과 동떨어진 호숫가 생활을 통해 소로는 후세의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교훈을 남겨줬지만 산속 오두막에 칩거했던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되찾았다. 2021년 봄에 국내 개봉됐던 로빈 라이트 주연 감독의 미국 영화 ‘랜드(Land)’ 속 여인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지금 기분이 어떤지 말해줄 수 있어요?”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힘들어요.”

“남들과 감정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거군요.”

“대체 그걸 왜 공유하려 애써야 할까요. 어차피 남들은 공감 못할 텐데….”

“그럼 고통 속에 혼자 있게 되잖아요.”

“…….”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는 여인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정신적으로 깊은 내상을 앓고 있음이 읽힌다. 이어 잔잔한 음악과 함께 타이틀 자막이 오르며, 도시를 떠나는 그녀의 차가 자그맣게 비친다. 광활한 벌판이 시원하고,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서 있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지만 운전대에 앉은 그녀의 표정은 어둡다.

어느 시골 마을에 차를 멈춘 그녀, 산악생활에 필요한 장비들을 사고 길을 떠난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가게 앞 쓰레기통에 핸드폰을 버린 걸로 보아선 세상과 통하는 모든 문을 닫는 듯하다. 비포장도로를 거쳐 한참 만에 도착한 산 중턱 오두막집, 안내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몰고 온 차를 처분해 달라고 부탁한다. 세상과 통하는 마지막 가교까지 걷어차는 모양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온 건 아니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허겁지겁 달아나 왔다. 보이는 건 울창한 숲과 계곡과 하늘뿐이다. 난생처음 맞닥트린 이런 오지 생활이 순탄할 리는 없겠지만 한동안은 인적 없는 고독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느낀다. 그러나 밤마다 들짐승 울음소리에 시달리고 전기와 수도 같은 문명의 이기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장작을 패 땔감 만들고 강에서 낚시하거나 엽총으로 사냥해 끼니를 겨우겨우 채워가는 일상이 그녀에겐 점차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거대한 곰의 습격을 받아 오두막 안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고 처음 가져와 쌓아 둔 캔 음식들도 초토화돼 버린다. 폭설이 쌓이면서 먹을 것 구하기가 여의치 않아지고 그녀는 점차 오두막 안에서 고립된 채 굶주림에 지쳐간다. 기아가 한계에 이르는 비몽사몽의 어느 순간 엽총으로 자결까지 시도하다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자매 동생을 떠올리며 정신 잃고 쓰러진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 남자가 오두막집에 들어서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고 영화는 후반으로 접어든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크든 작든 상처와 아픔을 겪는 과정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선 일상의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면서, 세상을 벗어나고픈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바로 눈앞에서 남편과 어린 아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영화 속 여인의 경우가 그랬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떨지, 그 마음의 상태가 충분히 공감되는 것이다.
 


사냥꾼 남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산 아랫마을 살며 수시로 찾아오는 그의 계속되는 도움으로 덫 놓는 법, 사냥 총 쏘는 법 등 산속 생활에 필요한 기본 노하우들을 습득해가며 점차 홀로서기 일상에 적응해간다. 작은 텃밭을 일구며 자급자족도 하고 야외 욕조 뜨거운 물 속에 누워 쉬며 풍광의 아름다움을 새삼 확인하는 등 마음의 여유도 생길 즈음, ‘당분간 오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남자의 발길이 예상보다 오래 끊긴다. 이상한 생각과 함께 하루하루 기다리던 그녀가 그의 행방을 찾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산을 내려가면서 영화는 결말로 다가간다.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홀로 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희망을 되찾게 된 여인, 절망에 빠진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스스로 구원받게 된 남자,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이 별다른 사건 전개 없이 건조하고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스스로 위로받은 느낌에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질 것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 와이오밍과 캐나다 앨버타 등지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난 로키산맥이다. 여인이 산을 내려가 찾아간 곳은 미국 와이오밍주의 산악마을 퀸시였고, 그녀의 오두막은 퀸시 인근의 인디언 보호구역 산악지대로 그려지지만, 실제 촬영은 캐나다 앨버타 주의 작은 마을 디즈버리와 인근 무즈산(Moose Mountain)에서 이뤄졌다.

마음 편히 여행 떠나기엔 여전히 부담스러운 코로나 시대, 스크린 통한 간접 여행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시 소로의 고전 ‘월든’의 경구를 떠올려본다.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진다. 그때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게 되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