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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사람들의 유명한 농담이 있다. '우리도 중국처럼 나라가 쬐금했으면 좋겠어.' 이 농담은 내겐 실로 문화충격이었다. 실크로드 탐사를 위해 여름 한철을 사막과 황야 그리고 거대한 성벽을 가진 고대도시 등 드넓은 중국대륙을 헤매던 것이 생각나서다. 하지만 이르쿠츠크, 바이칼을 건너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면서 그 농담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에 사는 그들의 삶에 녹아있는 실제 생활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때는 6월 하순이었고 네바강 하구 삼각주 늪지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는 한창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다. 중세 군사와 주민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해자(垓字) 쪽으로 몰려와 성문을 열어 달라 소리친다. 어느 시절, 어떤 사건의 장면일까. 표트르대제 등극 이후일 테니 1756년 프로이센과의 7년전쟁 장면일까. 요새 안에는 구(舊)소련시절 구입했던 러시아사 책표지에서 수없이 봤고 도시 곳곳에서 보게 될 표트르대제의 청동기마상이 위풍도 당당하게 서 있다.

 

◆불멸의 차르 표트르대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다

 

왕위 계승과 권력 투쟁 암투를 치열하게 치른 모계 몽골선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표트르는 차르의 신분을 숨기고 미하일로프란 가명으로 유럽 사절단 귀족들에 섞여 서유럽의 기술을 배우러 갔다. 프로이센에서는 포병 부사관으로 가장하여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네덜란드에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기술을, 영국에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다. 또 해부학과 응용과학까지 익히고 귀국했다.

 

유럽 교역로의 필요를 절실히 깨달은 그는 스웨덴에게서 이곳을 빼앗은 뒤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명명하고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하지만 땅은 척박했다. 황량한 습지는 파도가 높은 날이면 바닷물이 들이치고, 겨울이면 차가운 북풍을 정면으로 맞는 곳이었다. 표트르는 이 도시가 성인과 순교자들의 힘으로 지켜지기를 원해 페트로파블롭스크(베드로와 바울의 요새)로 이름 지을 만큼 독실한 정교도였으므로 유럽식 인공도시 건설을 자신의 숭고한 목표로 삼아 불굴의 의지로 밀어부쳤다.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가여운 핀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외 지역의 석조건물 건축을 전면 금지시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퍼부었다. 하지만 습지를 매립해 삼각주와 늪지대에 도시를 세우는 것은 근대적 토목기술이 없던 당시로선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스웨덴 전쟁포로들과 러시아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농노 수만 명의 희생이 따랐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성스러운 이름에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도시는 자연적 지리 여건을 그대로 활용하여 지류들을 그대로 도심 수로와 운하로 만들어 북유럽의 베네치아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표트르대제의 이러한 업적을 추앙하여 손자며느리 예카테리나2세가 청동기마상을 세우고 그의 사후 백년 후쯤 푸슈킨이 위의 시를 썼다. 표트르대제가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로마노프왕조가 몰락하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명명된다. 그후 1991년 사회주의 개혁을 거쳐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표트르대제의 묘지는 다른 황제들과 함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있다.

 

 

◆넵스키대로,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백야

 

표트르대제를 거쳐 러시아제국 시대에 완성된 넵스키대로에는 거대한 반원형 열주회랑과 성스러운 이콘화 '카잔의 성모'로 유명한 카잔대성당이 있다. 중앙돔 높이가 80m로 바티칸 대성당만큼 엄청난 크기의 정교회성당이다. 근처에는 부침(浮沈) 많은 러시아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었던 만큼 알렉산드르2세가 폭탄 테러를 당해 숨진 장소에 아들 알렉산드르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피의 성당도 가까이 있다. 모스크바의 바실리대성당을 모방하여 지었으나 내부는 더 화려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황제가 주로 거주하던 정궁(正宮)이자 제국의 겨울궁전이었다. 황실과 구(舊)소련의 수집품과 전리품들이 모아놓은 곳답게 전 세계에서 가져온 방대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겨울궁전과 4개의 건물에 전시된 작품들의 규모는 엄청난데 퀄리티는 개인적인 느낌으로 좀 빈약한 듯하다. 그 중 서유럽 전시실의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볼만했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과 소련 탄생의 방아쇠가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 1905년 겨울궁전 앞에서 일어났다는 사실과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에도 넵스키대로가 종종 등장한다는 걸 떠올리며 마린스키극장으로 갔다.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 등 발레 공연을 꼭 보고 싶었지만 일정과 맞물려 단원들의 휴가기간이라 극장의 화려한 커튼과 크리스털, 도금으로 장식된 하늘색 객석과 안락한 박스만 보고 나왔다.

 

여름궁전은 페테르고프궁전이라고도 불리며 핀란드만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향한 64개의 분수가 가득한 정원이 화려하다. 구조는 프랑스의 베르사이유를 닮았고 수많은 조각상들은 모두 금빛이다. 호수 중앙에서 악어의 입을 찢고 있는 트리톤(바다의 신) 조각상은 스웨덴에 대한 러시아의 구원(舊怨)이 담겨 있으며 7개 계단 주변에는 260개 희랍신화 속 금빛 조각상들이 휘황찬란하다.

 

역시 누군가의 말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고난과 구원, 빛과 어둠의 역사가 함께 펼쳐지는 무대인 모양이다. 화려한 여름궁전을 나와 옮겨 간 쿠즈네치니골목 5번지는 무언지 모를 어둠이 가득하다. 도스토옙스키기념관이다.

 

그가 말년 2년을 보낸 집 안의 낡고 작은 시계는 1881년 1월 28일 8시 35분 그가 숨을 거둔 그 시간에 멈춰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쓸 당시 그가 쓰던 모자와 우산, 탁자와 의자, 펜과 잉크병과 원고지도 그때 그 자리 그대로라고 한다. 아, 그러고 보니 글을 쓰고 있는 며칠 남지 않은 올해 2021년이 그의 탄생 200주년이다.

 

나의 러시아 여행은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끝없는 자작나무 가로수 길을 달려 키예프로 모스크바로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였다. 가는 곳마다 도스트옙스키, 톨스토이, 고리키, 푸슈킨, 무소로그스키, 레핀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이 늘 함께 했다. 러시아 예술의 상징인 듯 한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야(白夜), 해가 말갛게 떠있었다.

 

박미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