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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말들이 다닌 길 ‘공마로’…唐과 교역한 포구는 ‘당포’

(111) 지명에 깃든 비사
과거 여러 관청 있던 감산리
숙젱이·비접골·섬비구석 등
제주의 역사 담긴 지명 많아 
누런 물개·깅이 있는 조간대
황개창·황게창으로 불리기도

 

오래전 제주에서는 왜구가 괴롭히는 바닷가를 피해 용천수가 솟는 고지대에 마을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대표적인 마을이 표선면의 토산리와 안덕면의 감산리 등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2006년 발간된 안덕면지와 마을지에 실린 글에서 빌렸다.

1430년(세종 12) 제주경차관으로 온 사복소윤(司僕少尹) 박호문이 ‘정의와 대정 두 현의 성안에는 샘물이 없기 때문에 정의현에서는 15리 가량 떨어진 곳에서, 대정현에서는 5리 가량 되는 곳에서 물을 길어옵니다. 만일 왜구가 침입하여 여러 날 성을 포위하면 바다 가운데 있는 외로운 섬으로 살아날 길이 없기에, 정의현은 토산(兎山)으로, 대정현은 감산(甘山)으로 옮기기 바라나이다.’ 하고 정의현과 대정현의 이설을 건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제주의 17현 중 하나인 산방현의 중심지인 감산리에는 여러 관청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제주의 비사를 품은 지명이 많은 편이다.

공마로는 나라에 바치는 말들이 다닌 길을, 만세왓은 목사와 현감 등을 마중 또는 배웅하던 곳이자, 마을 유림들이 임금이 별세하면 곡을, 새 임금이 등극하거나 왕자를 낳으면 만수무강을 축원하던 곳이다.

숙젱이라는 곳은 죄인을 참수하던 망나니와 형장이 있던 데서 연유하는 지명이다.

진르는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고, 흔들르는 왜구가 침입하면 호롱불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던 곳이다.

비접골은 부상 당한 병사들이 치료를 받거나 휴양하던 병영이고, 광제골은 법원과 같은 관공서가 있던 곳으로 범죄자를 심판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섬비구석은 안덕계곡 남반내에 거주하는 양반들의 심부름을 담당했던 이들이 살았던 구석진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고, 솟대왓에서 변음된 솔대왓은 붉은 장대인 솟대를 높이 세워 출입하는 이들에게 과거 급제 등 마을의 경사를 알리고 잔치와 놀이를 펼치기도 했던 곳이다.

제주도의 여러 마을에 있는 선비들이 활을 쏘던 사장터도 이곳에 있음은 물론이다.
 

 

▲당포와 송항에 관한 비사

바다와 해변의 바위로 앞이 막혀 있는 박수기정 북쪽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를 앞막은골이라 부른다. 앞막은골이 끝나는 지점에 당포 또는 송항이라 불렸던 대평포구가 있다.

당포(唐浦) 또는 당캐라는 지명은 당나라와 원나라 등에 말과 소 등을 실어 나르는 세공선과 교역선이 드나들던 데서, 송항(松港)은 일제강점기에 커다란 소나무가 포구 근처에 있던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1801년 10월 30일)에 실린 당캐에 관한 기록이다.

‘제주 대정현 당포에 어느 나라 배인지 모르는 큰 선박이 지나가다 다섯 사람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들의 옷과 모자가 매우 괴이하고,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았다. 얼굴과 몸이 검어서 팔 긴 원숭이 같고, 왜가리가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것 같아서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글씨를 쓰게 한즉 왼쪽에서부터 횡서로 쓴 것이 사람의 이름도 그림도 아닌 엉클어진 실 모양과 같았다. 신하가 임금(순조)에게 아뢰자, 육로로 해서 북경에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대평포구는 일본어선들이 오가기도 했던 큰 포구였다. 그들은 가을과 겨울에 잡은 고기들을 송항인 대평포구 한 켠에 저장했다가 봄에 일본으로 실어가기도 했다. 다음은 대평리 출신인 양언보(1943년생) 님의 증언이다.

‘대평리 포구에는 고래공장이 있었어요. 마을 안에 기생집도 있었구요. 일본 놈들이 와서 건척선을 바깥에 세워놓고 고래 잡은 것을 가공해서 가져갔거든요. 그래서 술집과 기생집이 있었지요. 1940년대에 없어진 것 같아요.’
 

 

 

▲깅이의 산란장 황게창 비사

화순 남제주화력발전소 동쪽 하천을 흐르는 황개천은 오래전엔 포구였다.

이원진 목사가 1653년 편찬한 탐라지에는 大浦(한개)로, 18세기 편찬된 제주읍지에는 抗浦(항개)로 표기되어 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조간대인 이곳에 누런 물개가 나타난다 하여 황개창으로, 누런 깅이가 많이 산란한다 하여 황게창으로도 불렸다.

또한 한라산 남서쪽 삼형제 오름 일대에서 발원하여 안덕계곡으로 유입된 물줄기가 황개천까지 거칠게 내려오기 때문에 거친내라 하여 황개천(荒川) 또는 황개창으로도 불렸다.

민속학자 고광민은 이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간대에 사는 황게인 누런 깅이는, 본토에서는 겨울에 산란하는 데 비해 이곳에서는 여름에 산란한다. 여름에 깅이가 산란할 때면 수놈 깅이가 먼저 신방을 차리는데, 깅이 신방을 매띠라 부른다. 내에 사는 깅이라 하여 선인들은 냇깅이라 했다. 지금은 사라진 황게의 산란장을 이곳에 복원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잃어버린 문화를 되찾는 의미있는 사업이 될 것이다.’

황개천 계곡 30여 미터 높이의 암벽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줄기가 산을 향해 반듯하게 솟는 이곳을 ‘산받은물’이라 부른다.

오래전 마을에서 마을제 등 치성을 드릴 때에 이 물을 길어다 사용해왔다. 한라산 정상 남쪽에 있는 산버른내와 황개천 계곡에 있는 산받은물이란 지명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