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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사랑·배신·분노…인생과 맞바꾼 처절한 복수

(27) 폭풍의 언덕
주인집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모욕을 받고 떠난 히스클리프
지고지순했던 마음은 연인의 죽음 후 집착과 광기로 이어져

 

170년 전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는 영국 문학사에 길이 남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시골 촌구석 출신의 자매가 거의 동시에 대단한 소설을 한 권씩 출간한 것이다.

언니인 샬롯 브론테가 ‘제인 에어’를 발표했고, 몇 달 후에는 동생 에밀리 브론테가 ‘폭풍의 언덕’을 발표했다. 언니의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호평을 받으며 성공했다. 동생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의 출간 반응이 시원치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으로 이듬해 생을 마쳤다. 서른 살의 짧은 생이었다.

두 자매의 문학적 토양은 어릴 적부터 살았던 황량한 벽촌 마을이었다. 요크셔의 황무지 땅, 헤더 꽃이 초원을 덮는 무어랜드(moorland)가 늘 작가와 함께 있었기에 '폭풍의 언덕'이라는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 ‘폭풍의 언덕’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남녀가 말 달리고 사랑을 나누던 요크셔의 황무지 무어(moor)와 그 위에 찬란했던 보라색 헤더(heather) 꽃밭의 모습이다.

원제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는 황량한 들판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외딴 저택의 이름을 일컫는다. 등장인물들의 3대에 걸친 사랑과 증오가 뒤엉켜온 삶의 현장이다.

‘처음 이 집을 발견했을 때 누가 살았을까 궁금했다. 어떤 삶이었을까? 마음속으로 속삭임이 들려왔고 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92년 개봉된 영화 ‘폭풍의 언덕’은 작가의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원작 소설의 시작도 비슷하다. ‘영국을 통틀어도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을 싫어하는 자에겐 다시없는 천국이다.’
 

 

폭풍의 언덕에 있는 저택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토마스 언쇼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다. 장남 힌들리와 여동생 캐시이다.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를 데려왔다. 소년이 불쌍하기도 했고 뭔가 모를 끌리는 점이 있어서였다. 언쇼의 장남 힌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증오하지만, 여동생 캐시는 그를 친오빠 이상으로 좋아하고 운명처럼 서로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 언쇼가 죽고 재산을 상속 받은 장남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학대하기 시작하고 그를 하인처럼 다룬다. 그토록 사랑했던 캐시마저 근처의 대저택 상속자인 에드가 린튼과 결혼하게 되자 큰 상처를 입은 히스클리프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워더링 하이츠를 떠나버린다. 몇 년 후 부자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힌들리의 빚을 갚아주면서 워더링 하이츠를 자기 소유로 접수하고 복수를 시작한다.

평생 동안 캐시란 여자 딱 한 명만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한 히스클리프의 집착은 광기가 되어 캐시가 죽은 후까지 이어진다. 그들 각자의 2세 아들과 딸들의 인생에까지 그 광기가 파급되어가고, 히스클리프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불행한 사랑은 끝이 난다.

화신, 복수의 화신, 사이코 정도로 독자들에게 각인돼 있던 히스클리프는 영화에선 평생 한 여성에게만 헌신한, 외롭고 가련한 영혼이나 다름없이 그려진다. 욕심을 쫒아 배반한 여인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캐서린도 영화에선 그 반대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죄의식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다간 불행한 여인이다.

요크셔 지방의 황무지, 무어랜드를 직접 걸어본다는 건 영화 ‘폭풍의 언덕’ 속 남녀 주인공의 일상을 직접 경험해보거나, 불우한 삶을 살았던 브론테 자매의 인생을 훔쳐보는 일이기도 하다. 거친 바람과 폭우 속에서 황량한 벌판을 말 달리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두 남녀의 모습이 환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브론테 가문의 세 자매인 샤롯, 에밀리, 앤의 인생은 ‘폭풍의 언덕’ 소설만큼이나 어둡고 불운한 삶이었다. 큰 언니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출판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지만, 동생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은 출판 직후부터 혹평을 받았다. 폐결핵을 앓던 에밀리는 출판 후 얼마 안 되어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막내 앤 브론테도 같은 병이었고 이듬해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생들에 비해 행운이 따랐고 결혼까지 하여 행복하게 사는가 싶었던 큰언니 샬롯도 임신 중 입덧이 악화되어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음의 그늘이 항상 세 자매 주위를 따라다녔나 보다.

에밀리가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이사해 정착한 요크셔의 무어 지역은 자매에겐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준 토양은 되었지만, 안온한 생활의 터전은 못 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폭풍의 언덕’을 쓰면서 에밀리는 황무지 무어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모양이다.
 

 

‘내 동생 에밀리는 무어를 무척이나 사랑했어요. 동생은 무어에서 황량한 고독을 느끼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어요.’

샬롯 브론테는 동생 에밀리가 죽은 후 그녀의 무어 사랑이 병처럼 깊었다고 어느 편지에서 술회한다. 요크셔의 무어 지역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황량한 아름다움은, 오래 전 살았던 불우한 여작가의 마음속에도 늘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자매가 살았던 당시나 지금이나 요크셔 무어의 정경은 비슷했을 것이다.

“아, 저 바람을 쐬게 해 주세요. 황야를 건너 똑바로 불어오는 저 바람, 단 한 번만이라도 마시게 해 주세요. 저 언덕에 피어있는 헤더 속으로 뛰어들면 나는 꼭 되살아날 거예요. 다시 한 번 창문을 활짝 열어 주세요.”

영화 속에서 죽음을 앞둔 캐서린이 그렇게 갈망했던 그 황야와 바람은, 수년 전 여름 15일간 잉글랜드를 횡단해 걷던 나에겐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93년 이 작품에서 광기의 남주인공 히스클리프 역을 소화한 랄프 파인즈는 이듬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열연했다. 여주인공 캐서린과 딸까지 2인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는 ‘프라하의 봄’, ‘퐁네프의 연인들’. ‘세 가지 색 블루’ 등으로 유명한 대배우이다.

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두 남녀배우는 몇 년 후 ‘잉글리쉬 페이션트’라는 명작에 두 주인공으로 연기하여, 이 작품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브론테 자매의 막내 앤 브론테는, 영국 횡단길 CTC가 끝나는 종착지 근처 도시 스카버러에 묻혀 있다. 사이먼 가펑클의 노래 ‘스카버러의 추억’에 나오는 그 도시이다. 북해를 내려다보는 스카버러 언덕 위 교회에 그녀의 묘와 묘비가 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