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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이영철의 색다른 여행] 산지천서 백록담까지...하루 13시간 고난도 길

(1) 한라산 제로포인트 트레일
해발 제로 포인트 용진교서 출발해 관음사 야영장으로 이동
관음사코스로 등반해 성판악코스로 하산총 거리는 31㎞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단 생각이었다. 1년 전까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 백록담을 몇 번 더 오를 수나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 작년 여름 발목 골절로 3개월 깁스를 하고 나서의 자신감 변화에, 나이 60 넘어 관절 혹사시키면 금세 불편해진다는 주변의 조언도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한편으론 지금의 내 몸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도 꿈틀거린다. 아직은 그다지 늙지 않았음을 주변에 보여주고픈 은근한 과시욕도 숨길 순 없다.

‘제로포인트 트레일’이라는 색다른 루트로 한라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백록담 정상에 오르는 길은 완만한 성판악코스와 가파른 관음사코스가 전부다.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 들로는 정상보다 300여 미터 낮은 남벽분기점이나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내려와야 한다. 해발 제로(0m) 포인트인 원도심 산지천의 마지막 다리 용진교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야영장까지, 이어서 관음사코스로 한라산 정상 동능에 오른 후 성판악코스로 하산하는 루트가 ‘제로포인트 트레일’이다.

총거리 31㎞이다. 새벽 4시에 산지천을 출발하면 오후 5~6시에 성판악에 도착한다. 당일 하루에 13시간 이상을 걸어 고도 차 2천 미터 가까이를 오르고 내리는 울트라 트레킹 코스는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다. ㈜제로포인트트레일(064-702-1947. 제주시 산지로 25. https://zeropointtrail.com)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 몇 년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육지인들 중심으로 꽤 인기를 끌고 있다.

일단 블로그 등 SNS에 3주 후에 도전한다는 구체적 계획을 올렸다. 자신감이 반반인 상태였기에 이렇게 ‘나 언제 뭐 합네’ 하고 동네방네 떠들어 두면 도중에 포기하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게 된다. 남은 기간 동안 체력 훈련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혼자 오르다 무슨 변이 생길 수도 있으니 함께 할 멤버를 모으기로 했다. 2년 전 홍콩트레일 50㎞를 함께 걸었던 남국성 아우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다. ‘민폐 끼칠까 걱정’ 운운하며 자신 없어 하는 걸 사탕발림으로 꼬셔서 넘어오게 했다. 내가 혹시나 중도에 낙오하면 들춰업고 내려올 백기사로 고교 후배인 김도훈 군을 점찍었다. 지난 3년에 걸쳐 국내 블랙야크 100대 명산을 모두 섭렵했기에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등산로를 구석구석 잘 알고 가이드해 줄 적임자로는 유튜브 채널 ‘하르방 TV’를 운영하는 고수향 작가를 염두에 뒀다. 한라산을 500번, 백록담엔 300번 이상 오른 경력이라 등반 도중에 이런저런 해박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마지막으로 제주트레킹연구소 이권성 소장에게도 연락했다. 최근에 농업회사법인 ‘덩굴원’ 경영에 박차를 가하는 그의 근황도 궁금해서였다. 3인 모두 나의 간단한 전화 제안만으로 ‘예, 좋쑤돠. 고치 해보게마씀’이란 즉답을 해줬고, 그렇게 60대 아재들 5인이 모였다.
 

 

10월 25일 새벽 4시, ‘Zero Starting Point’란 동판 앞에서 서로 인증 사진 찍어주고 용진교를 출발했다. 제주에 살아도 새벽 일찍 이곳에 나와 볼 이유가 없었던 그들이다, 산지천 주변의 새벽 운치에 모두 감탄하는 눈치들이다. 관음사까지 꾸준한 오르막 13㎞를 구태여 걸어 올라갈 이유도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모두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잘들 걸어간다. 제주대사거리까지 2시간 지나 산천단에 이를 즈음 날이 밝아왔고, 7시 15분에 관음사 야영장에 도착했다.

등산로 입구 평상 위엔 모두를 위한 아침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낭군과 일행 4명의 산행을 독려하려 양은주 여사가 새벽부터 준비해온 음식들이다. 따끈따끈한 김밥에 국수 한 그릇씩 그리고 막걸리 딱 한 잔씩으로 든든하게 배를 불리고 8시에 출발했다. 양 여사가 나눠준 파전과 김밥과 귤과 삶은 계란 등으로 각자의 배낭은 조금씩 더 묵직해졌고, 충분한 간식과 점심꺼리 탓에 마음은 한결 넉넉해졌다.

관음사 코스가 험난하다는 악명은 탐라계곡 목교를 건너면서부터 실감이 된다. 목교부터 이어진 계단길은 거의 수직 경사라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파르다. 목교 직전 벤치에 앉아 충분한 휴식과 간식을 취한 덕택에 다섯 모두 여전히 팔팔하다. 10시 넘어 개미목을 지난 후 150m 가량 코스를 벗어나 특전사 장병 53명의 넋을 기리는 원점비 앞에서 잠시 묵념하고 돌아섰다.

삼각봉은 몇 년 전 성판악코스로 오른 후 관음사로 하산하며 뒤돌아볼 때의 평이했던 느낌과는 영판 다르다. 기다란 숲길 끝에 대피소 지붕 위로 갑자기 솟아난 듯한 삼각의 봉우리가 중턱을 둘러싼 두터운 뭉개구름과 함께 웅장하기 그지없다. 30분 뒤인 12시 반부터 입산을 통제한다는 확성기 소리에 밀려 15분만에 대피소를 출발했다.
 

 

 

용진각 현수교에서 정상까지 이르는 한 시간 가량은 모두에게 마지막 땀방울까지 짜내게 만드는 고난도 구간이다. 동시에 주변 산세에 온전히 압도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정면의 백록담 북벽을 중심으로 왼쪽엔 왕관릉이 웅장하게 버텨서 있고, 우측엔 장구목 능선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아름답게 이어진다.

맞은편 내려오는 분들의 ‘힘내세요. 10분 남았어요’ 하는 격려 말에 솔깃했다가 10여 분 후 역시 같은 말에 맥빠지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오후 1시 45분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고교시절엔 내려가 놀며 라면도 끓여 먹었던 백록담 바닥은 물 한 방울 없이 메말라 있다. 삭막해 보이는 백록담과 달리 동능 주변은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는 등반객들로 활기가 넘쳐난다. 백록담 표지석 앞에는 우리 순서가 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기다랗게 줄지어 서 있어 왁자지껄하다. 정상 아래로 두텁게 깔린 뭉게구름이 우리 마음을 한껏 들뜨게 만든다. 구름 아래 제주 바당과 구름 위 너무나 쾌청한 가을 하늘은 똑같이 푸르고 푸르다. 혹시 모르니 가져가야 한다며 아내가 배낭 속에 찔러 준 아이젠과 털장갑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도 나온다.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요, 가장 비싼 산은 부동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산은 하산(下山)’이라는 엄홍길 대장의 말을 되새기며 정상을 내려간다. 성판악 코스로 진달래밭과 속밭 대비소를 거쳐 성판악 주차장까지 4시간쯤 걸리리라. 하늘 맑은 가을날이다. 60대 아재 우리 5인에겐 앞으로 남은 인생에 흔치 않을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월의 하루였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