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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신사 터·비행장·갱도진지...전쟁 요새화 흉터

(108) 일제강점기
1914년 1차 세계대전 전후
일제 군사기지 도내 조성돼
중국 공격·일본 본토 방위
황국신민화 정책 일환으로
애국반 조직해 전쟁 지원도

 

▲안덕·대정 지역에 산재한 일제의 전쟁 상흔

제주도는 동북아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한반도·중국·일본과의 삼각지대에 자리한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바람 타는 섬으로 부침도 많았다.

1270년대 초에는 진도 용장성을 걸쳐 제주에 입도하여 응전하는 삼별초와, 삼별초를 추격해온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으로 제주선인들은 등 터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해안가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방어하려 고려시대부터 쌓은 환해장성을 더욱 확장하고 구축하는 한편, 3성 9진 25봉수대 38연대라는 독특한 방어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도의 독특한 방어유적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내선일체 속에 숨겨진 간교한 정체성 혼란 및 파괴 책략에 의한 결과이다.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시작된 무단통치로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 일제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소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라는 민족분열통치로 식민지정책의 무늬를 바꾸기도 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지속적으로 일으킨 일제는 1939년부터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을 통해 민족말살정책을 이어가려 했다.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한 일련의 흔적들이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이곳 안덕과 대정지역이다.
 

 

▲일제의 전쟁준비에 강제 동원된 선인들

일제의 군사기지가 제주도에 처음 들어선 것은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점부터이다.

중국 청도에 있는 독일 공군기지를 공격하려 모슬봉에 전파통신탐지시설을 설치하면서 일본군이 모슬포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시에도 모슬봉에 전파탐지기지를 설치하여 중국 중경에 기지를 둔 미군 비29 폭격기의 일본 출격을 탐지하고 연락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노골화한 일제는 모슬포에 건설한 일본 해군비행장(알뜨르 해군항공기지)을 중국 본토 폭격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1938년부터 일본은 우리나라를 전시체제로 전환시키려 일본정신 발양주간·근로보국주간 등을 설정하여 각 면에 신사 설립 및 참배를, 집집마다 가미다나(일본의 천조대신을 모신 선반)를 만들도록 강요하였다.

1939년부터 청년훈련소를 학교에 설치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시킨 일제는 지원병이란 명목으로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우리말 사용을 금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며, 일본인과 같이 병역의무를 지게 하였다.

1943년부터 미국의 반격으로 본토 방위에 위협을 받게 된 일제는 제주도를 본토 방위의 거점으로 정하고, 제주도 요새화 작업을 서두르게 하였다. 거의 모든 학교에서 애국반을 조직하여 황민화의 도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작은 조직단위인 애국반은 초기에는 신사참배와 반상회 참가 등에 활용되었고 전쟁 확대로 근로봉사와 금은 식기공출·국채 구입·국어(일본어) 보급 등 갖가지 동원의 기초단위가 되었다.

일제는 ‘제국의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케 할 수 있다’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조선인들을 징발하였다. 16세에서 60세까지 징발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12살에서 70살까지로 대상을 늘이기도 했다.

제주섬에 산재한 일제에 의해 구축된 전쟁유적은 선인들이 겪은 고단했던 삶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평화의 소중함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유물유적이기에, 후손들에게도 길이 남겨야 할 어둡고도 슬픈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다.

월라봉의 일제갱도진지와 알뜨르비행장 일대 등 일제 전쟁 유물유적을 잘 보존하고 알리는 것은 일본의 반인륜적인 폭거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화순리 등지의 신사 터와 일제의 기만적 황민화 정책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어 우리나라 도처의 요지에 신사를 세워나갔다.

제주시에서는 1565년 동성을 쌓으며 설치한 북수구 문루였던 공신정을 1935년 헐어내고, 그 자리(지금의 제주기상청 자리)에 제주신사를 건립하였다.

일제 당국은 신사를 읍면 지방까지 확대하려 1939년 면 소재지에 일본의 개국신주를 모신 신명신사의 건립을 당시 도사(스즈키)와 도내 친일인사 93명이 조선총독부에 출원하는 형식으로 허가받게 하였다.

조국이 해방되자 제주선인들은 신사들을 부수는 일부터 했다.

당시 신사 건립 출원인으로 각 지역의 면장을 앞세운 일제는 주민 스스로 세운다는 명분을 내보이며 자신들의 흉계를 감추려 했다.

신사가 있었던 장소로는 안덕면은 안덕초등학교 북서쪽 뒤편 언덕에 있는 신사동산, 대정읍은 상모리 구릉 주변의 신사동산, 애월읍은 애월중 옆 송림 사이, 한림읍은 한림교회 근처, 서귀포는 정방동사무소 근처, 남원읍은 남원중 근처, 표선면은 표선중 근처, 성산읍은 일출봉 서쪽 신사언덕, 구좌읍은 세화리 망동산과 김녕중 근처, 조천읍은 옛 면사무소 근처 등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