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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카프리 섬

태양과 바람과 바다의 목소리가 머무는 곳…잔혹한 로마 황제들도 반한 풍광

 

그해 여름은 무더웠다. 셀 수 없을 만큼 자잘한 일들은 무거운 땀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눈에 띄는 모든 현상들이 이글이글 타는 흙사막처럼 황폐해져갔다. 온 정신이 먼지처럼 흩날리는군, 문득 롬바르디아평원의 제비꽃빛 노을이 보고 싶었다. 회적색 포플러의 실루엣과 호수에 얼비치는 노을, 그 아래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갈망이 점점 강렬해져갔다. 때마침 서울의 한 모임에서 몇 년 동안 계획만 하던 이탈리아로의 여행 제의를 받았다.

 

'제 여행의 중요한 의도는 육체적, 도덕적 폐해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음은 참된 예술에 대한 뜨거운 갈증을 진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상당히, 후자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히 괴테의 경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레오나르드 다빈치공항(피우미치노 국제공항)에서 약지에 끼던 반지를 잃어버린 일, 사납게 굴던 공항 여직원, 느린 버스, 숨이 막힐듯한 습기와 그로 인해 덧난 알레르기는 떠나온 곳에서의 폐해를

 

치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해 여름 잃어버린 그 반지는 지금 어디 있을까.로마에서의 일정만 함께 한 뒤 나는 혼자 제비꽃빛 노을이 지는 롬바르디아평원을 건너 밀라노로 갔다. 그곳에서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의 묘지를 찾고 싶었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스칼라좌(座) 옆 카페에 앉아 전화로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피렌체로 넘어가 이틀을 묵고 나폴리로 갔다. 누군가 극찬해 마지않던 카프리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나폴리는 그러니까 대낮이지만 좀 어두컴컴했다.

 

 

나폴리 시민들은 서기 79년 8월 4일 베수비오가 분화했을 때, 수호성인 성(聖)야누아리오가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북풍이 아닌 동풍이 불었을 테고, 폼페이 대신 나폴리가 멸망했을 거라 믿고 있다고 한다. 그 오래된 화산재 탓인지 카프리 행(行)페리를 타기 위해 몰로베베렐로항구로 가는 길에서 본 카스텔 누오보마저 칙칙했다. 베수비오 너머 폼페이와 소렌토는 일단 카프리를 다녀와서 볼 요량으로 페리를 탔다.

 

나폴리만의 남쪽 입구 부근, 소렌토 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흰 화산섬 카프리는 길이 6km, 넓이2km, 총면적 4백만평(3.97㎢) 정도로 섬 동쪽과 중앙을 카프리, 서쪽을 아나카프리로 부른다.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 세 황제들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악티움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집트를 거의 사유재산처럼 소유하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대리석으로 바꾸어가'고 있을 때였다. '신이 섬을 만들고도 그 아름다움에 놀라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의 카프리를 한 번 보고는 반해버려 네 배나 넓은 이스키아섬과 맞바꿔 10년을 그 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마지못하다는 투로 양자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상속했다.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 루드실라에 의해 출생부터 황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티베리우스는 치세마저 늦은 나이인 56세에 굴욕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원로원의 미움과 반란, 음모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정치에 환멸을 느껴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원격조정 방식으로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에 은둔했다. 티베리우스의 이러한 은둔정치는 로마의 우편제도와 우편배송시스템으로 제국 전체의 돌아가는 사정을 손금 꿰듯이 읽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에 12채의 빌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다른 두 채와 폐허 상태인 빌라 요비스의 흔적만 섬 서쪽인 아나카프리에 남아있다. 이 곳에서 티베리우스는 황위를 노린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철저히 농락당해 왕위 계승자 대부분을 몰살시키게 된다. 나중에 이를 알게된 그는 격분하여 세야누스와 연루된 모든 이들을 멸하는 공포정치를 편다. 물론 자신에 대한 암살을 두려워하며 원로원으로 배송시스템을 통해 서한을 보내는 원격조정 방식이었다.

 

페리가 1시간 남짓 걸려 마리나그란데 항구에 도착하면 섬 중심가인 카프리까지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간다. 움베르토 1세 광장을 지나 피아제타 광장에 이르면 레스토랑, 샵, 카페, 바, 호텔 등이 섬의 좁은 공간을 활용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거의 대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샵들이다. 역시 다이애너비와 찰스황태자,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박지성 선수 등 유명인사들의 허니문 여행지, 휴양지이며 세계적인 부호들과 소피아 로렌 등 스타들의 별장이 곳곳에 있다.

 

 

이 길을 아마도 서기 37년 79세의 나이로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나중에 폭군이 될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언제 살해당할지 모를 조바심을 안고 걸어 다녔으리라. 하지만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오래 되짚기에 이 섬은 너무나 고혹적이다. 광장을 비껴 골목을 따라 쭉 내려가 자코모정원과 카르투시오수도원을 지나면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정원이 있다.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과 꽃, 조각품이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오래 서성거린다.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와 세 개의 거대한 바위섬 파라글리오니와 마리나 피콜라 항구까지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비아 크룹(Via Krupp) 길을 두고 어찌 돌아갈까.

 

이천년 전의 잔혹했던 황제들에게마저 연민이 생긴다.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라 명명했던 아우구스투스도, 파란만장한 인생의 끝자락에 섰던 티베리우스도 젊은 칼리굴라도 이 풍광을 내려다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다면 티베리우스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물려받은 재산의 20배를 남길 정도로 로마의 권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시킨 황제였다.

 

다만 치세 내내 국민들과 원로원의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확실한데, 냉정하고 오만한 그의 성격과 말년의 공포정치 탓이 컸다. 칼리굴라 또한 부모형제 모두 황위 쟁탈로 살해를 당하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던 청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연민이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스웨덴 의사이며 작가인 악셀 문테는 티베리우스황제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 산미켈레 별장을 세웠다. 섬의 중심인 몬테 솔라로(Monte Solaro, 589m) 산 정상까지 1인용 체어 리프트를 타고 지중해와 소렌토 반도 그리고 카프리를 훨씬 광활하게 감상할 수도 있다.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독특한 푸른빛을 발하는 데서 이름이 기원한 그로타 아추라(푸른 동굴)는 배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날씨가 궂으면 들어갈 수 없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 나는 여러분이, 그리고 후세들이 이러한 내 뜻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 내가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과 후세들은 내 명성에 넘칠 만큼 충분히 공헌하는 겁니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그의 책 『연대기』 에 쓴 티베리우스의 원로원 연설 중 일부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극도로 싫어했다.(시인)

 

특집부 weekl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