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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고향 떠나는 말들의 구슬픈 울음소리 맴돈다

(103) 남반내·당캐포구
고려·조선시대 수십만 마리 馬
본토와 중국으로 실어서 보내
목장서 안덕계곡 남반내 지나
당캐(대평)포구 통해서 뭍으로
목마 주된 산업이던 제주 선인
사교역 금지로 생계 위협 받아

 

▲당포(唐浦)로 가는 ᄆᆞᆯ질(말길) 통로

제주목장은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공마 공급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조선에 들어서도 탐라순력도 공마봉진(貢馬封進)에서 보듯 제주도는 매년 300필에서 많을 때는 1000여 필이 넘는 말을 보내야 했다. 남도영의 제주목장사(2003)를 근거로 한 제주향토문화사전(김찬흡 편저, 2014)에 의하면 1398년 4414필, 1446년 1만여 필, 임진왜란 이후인 1604년 4800필 등을 실어 보냈다 한다.

고려와 조선 그리고 중국의 당·송에 이어 원·명 시대를 거치며 수십만 마리의 제주마들이 여러 포구를 통하여 본토와 중국으로 실려 나갔다. 말들이 실려 나간 여러 포구 중 하나로 추정되는 포구가 당캐이고, 당캐로 향하던 말들이 다녔던 길이 지금 우리가 명품길로 여기는 아주 자그마한 돌빌레 소롯길인 ᄆᆞᆯ질이다.

여러 국유목장에서 길러진 말들을 당캐로 몰고 가려면, 우선 남반내 얕은 계곡을 건너 군산 오름 근처의 흰돌ᄆᆞ루를 올라야 한다. 주변 지대가 대부분 현무암으로 검은색을 띠는 데 반해, 이곳은 하얀 빛깔을 내는 돌들이 더러 있어 흰돌루로 불려온 동산이다.

말들은 긴 동산이란 의미를 지닌 진ᄆᆞ루를 거쳐, 박수기정 위에 있던 마을인 이두어시의 외곽길로 향했거나, 앞막은골 사면의 숨겨진 ᄆᆞᆯ질을 따라 당포(唐浦)로 향했을 것이다.

당캐로도 불리는 당포는 공마를 실어 뭍으로 보낸 포구이다. 당캐 포구를 통해 공마를 보낸 명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 못지않게 선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역시 소중한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남반내 근처에는 서귀포시에서 설치한 다음의 내용을 담은 안내문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기가 군마훈련소인 6소장이고 말을 이동시킨다는 공ᄆᆞᆯ케(ᄆᆞᆯ질공마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를 입증할 수 있다. …고려 성종(982-997) 전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관리를 남반이라 했다. (이곳은) 이때부터 액정국(液庭局)으로 하다가 충성왕때 내알사로 했고, 조선 태조 때 액정서로 고친 부서의 소속 관료가 상주했던 장소이다.’

위에 등장하는 내알사(內謁司)와 액정국은 고려시대 관청의 이름이다. 국사대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직제로 동반과 서반 외에 제3직인 남반(南班)이 있었다. 남반은 양반(문반·무반)의 대열에는 들지 못하는 하급 관리였다.

남반이 중류계급 벼슬아치의 호칭으로 쓰인 것으로 미루어, 감산리에는 고려시대 전후 마소와 관련된 기관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안덕계곡의 남반내 지경은, 오래전 말을 진상하는 일을 관장했던 관리들인 남반들이 살았던 데서 유래된 지역으로 추정된다.

▲삼가 바다의 신이시여 순풍을 보내주시옵소서

공마를 보냈던 대표적인 포구인 한림읍 옹포(명월포) 부근에는 마대기빌레라는 지명이 있다. 마대기빌레라는 지명은, 순풍을 기다리는 테우리들이 말들을 대기시켰던 곶자왈 빌레라는 의미를 지닌 제주어이다.

이렇듯 제주의 여러 포구에는 바람을 기다리던 공마선과 공마가 다녔던 ᄆᆞᆯ질이 있었다. 그리고 공마선을 띄우기 전에 해신제를 지내기도 했었다. 해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대표적인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해신당이다.

▲파란만장한 제주마의 역사를 지켜본 대평포구

비경과 비사들이 가득한 앞막은골을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에 대평포구가 있다.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 제주도 편에 唐浦로 표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601년 길운절·소덕유 사건으로 위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김상헌이 쓴 남사록 등에는 堂浦로, 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등에는 唐浦로,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大坪·松港 등으로 기록된 대평포구는, 당나라 등 외국과 교역을 했던 포구로 추정되는 곳이다.

남제주군 고유지명(1996년)에 의하면 당포는 오래전 중국과 이루어진 교역의 중심항구 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중국 당과 원나라에 말과 소를 보내는 세공선과 교역선이 내왕한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 한다.

또한, 어사 이증의 남사일록(1680년)을 인용하며, 대정현에서 큰배를 붙일 수 있는 포구 중 하나가 당포라 하였다. 어사 김사헌의 남사록(1601년)에도 당포는 병선을 감출 수 있는 9곳 주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특이한 것 중 하나는, 이곳은 말 밀무역이 이뤄졌던 지역으로 오래전부터 회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인근의 마을인 대포(大浦)동에서 나고 자란 김오진 지리학 박사 역시 오래전부터 이곳은, 조선 초 말 밀무역이 행해졌던 포구로 구전되어왔다고 강조한다. 지리적으로 볼 때 관아가 일찍 들어선 산북지역보다 이곳 산남지역이 말 밀무역하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제주도의 땅은 화산회토로 이루어져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반면, 초원이 발달하여 마소(牛馬)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활용한 제주선인들은 오래전 농사보다 목마를 주된 산업으로 여기며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제주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은 말과 소에 대한 사교역 금지였다. 태종과 세종 이후 조선 정부는 특히 제주에서의 말 관리를 완전히 장악하여 통제하였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제주선인들은 말 밀교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뤄졌던 밀도살과 밀교역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우마적(牛馬賊)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주선인들은 말을 도살한 후 가공품으로서의 말을 교역했던 것이다. 건육포·말힘줄·말총 등의 여러 품목 중 가장 상품성을 띤 것은 가죽이었다.

다음은 세종실록(1434년)에 기록된 말가죽 교역과 관련된 부분이다.

“제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많아,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 소와 말을 도살하여 생계의 바탕으로 삼는 자가 자못 많고, 장사치들이 왕래하면서 우마피를 무역하여 생활을 이어가는 자 또한 많사옵니다(濟州地窄人多 生理艱苦 盜殺牛馬資生者頗多 商賈來往 貿易牛馬皮 以資其生者亦多)”

결국 조선 정부는 우마피 교역자들을 우마적으로 규정하여 처벌하였다. 처벌은 주로 평안도 등지로의 강제 이주였다.

1435년(세종 17) 강제 이주 대상자로 처음 파악된 숫자는 650명이었다. 하지만 남도영의 제주목장사(2003년) 등을 근거로 한 제주향토문화사전(김찬흡 편저, 2014)에는 실제로 가족까지 포함하여 30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