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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서로 도와 일하고 농작물 나눠 갖던 수눌음 현장

(102) 앞막은골 계단식 담장길
도처에 비경과 비사 가득해
기암괴석으로 막힌 마궁굴
반딧불이 서식지 고래소 등

계곡 남서쪽 급경사 수림에
농경지 또는 몰질 추정 담장
경사 가파르고 토질이 연해
계단식으로 평평하게 조성

 

가지 않은 길을 가듯 찾아간 앞막은골 도처에는 비경과 비사가 들어차 있었다. 기암괴석으로 막힌 동굴이라는 의미를 지닌 마궁굴 암자, 마궁굴 안쪽에 위치한 안마궁굴폭포와 ᄀᆞ래소(沼), 그리고 계곡 남서 급경사 수림지역에 숨겨진 계단식 담장은 앞막은골의 백미이다. 

곡식을 빻을 때 돌아가는 ᄀᆞ래(맷돌)처럼 폭폭수가 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ᄀᆞ래소에는 뱀장어 등 민물고기들의 낙원이었다고도 전한다. 청정지역인 이곳은 또한 반딧불이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수풀에 가려있던 계단식 농경지와 ᄆᆞᆯ질로 이어지는 담장길이 서서히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수풀에 가려진 계단식 담장길의 용도

월라봉 역사문화 걷는길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질토래비 답사팀은 앞막은골 서쪽 경사면을 오르다 수풀로 우거진 곳에서 계단식 담장들을 만났다. 예사롭지 않은 수풀 속 담장들을 얼추 정비하니, 오래전 이곳에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월라봉의 역사문화 걷는길을 탐사하기 시작한 이후 이곳 탐사에 동행한 사람들과 수풀이 우거진 월라봉 도처를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수풀에 묻혀있던 계단식 담장길의 종착지는 감산리에서 대평포구로 향하는 기존의 몰질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이 담장길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질토래비 답사팀과 지인들은 물론, 이곳 주민들도 이 담장길이 오래전에 조성된 농경지 또는 몰질이란 추정에 공통된 의견을 갖기에 이르렀다. 계단식 담장길을 몰질로 사용하면서, 또 한편으론 농경지를 만들어 농사도 지었으리라 여겨진다. 농사철에는 말들의 출입을 금하고, 농사철 후에는 이곳을 ᄆᆞᆯ질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공마를 보내야 할 상황이라면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계단을 내려가듯 농경지 담장길을 지나가게 했을 것이다. 

아울러 말들의 배설물인 똥과 오줌을 이용하여 바령밧을 일구기도 했을 것이다. 한 줌의 농토라도 활용하려 한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묻어나는 현장이 최근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계단식 농경지 또는 ᄆᆞᆯ질 축성에 동원되거나 부모로부터 축성 관련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만큼 이 담장길은 오래전에 조성되었다는 의미이다. 
 

 

▲계단식 농경지 칭밧과 젯밧·팻밧·찍밧

제주선인들에 의해 일구어진 농경지와 목축문화의 현장인 ᄆᆞᆯ질이 있어 더욱 반가운 곳이 월라봉이다. 오색토 등 품질 좋고 연한 흙이 묻혀 있는 월라봉 급사면을 농경지로 활용하려면 우선 계단식으로 담장을 쌓아 평지를 조성해야 했을 것이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월라봉에 묻힌 오색토라는 보물을 캐내듯, 오늘 우리는 월라봉에 숨겨져 선인들의 역사문화의 현장을 캐내어 현지 주민들과 도민들, 그리고 관광객들과 더불어 공유하려 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지금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밭의 의미를 지닌 ‘밧’이라는 제주어를 고문서에서 만났다. 젯밧은 제(契)와 밧(田)의 합성어이다. 제주선인들은 계를 제로, 밭을 밧이라 발음하였다. 

젯밧은 여러 사람이 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농사를 짓는 밭이다. 팻밧은 패와 밭의 합성어로 패는 무리 즉 같이 어울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농사짓는 밭이라는 의미로, 젯밧과 비슷한 의미이다. 찍밧의 ‘찍’은 ‘한 찍 두 찍’처럼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으로, 밭담으로 둘러싸인 농경지를 공동소유 하면서 농경지 일부를 나누어 차지하는 밭이란 의미이다. 층계로 된 밭의 의미를 담고 있는 칭밧은, 경사면의 계단식 밭을 일컫는 제주어이다. 팻밧과 찍밧, 그리고 칭밧은 안덕면·한림읍·애월읍·중문동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농사와 관련된 말들이다. 

다음은 제주도 민속학자 고광민이 2018년 펴낸 ‘창천리 梁氏家 고문서’에 실린 글이다.
 

 

‘안덕면 감산리 김유헌(현 안덕면 노인회장)은 이두어시라는 자연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두어시는 월라봉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두어시에 거주했던 김씨 조부를 비롯한 세 사람은 이두어시 지경 1년 2작의 1300평의 젯밧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여름 농사로 조와 콩을, 겨울농사로 보리를 재배하고 나서 농산물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한다. 하나의 농경지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하나의 밭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농사를 짓는 관습이 고문서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은 매우 깊었던 것 같다. 월라봉은 땔나무와 목재, 우마의 월동사료인 촐, 지붕을 이는 새와 각단, 여름과 겨울 농사 등 여럿이 힘을 모아 농작을 이루어 내려는 젯밧의 관습이 전승된 수눌음의 현장이다.’

4·3으로 사라진 마을인 월라봉 이두어시에서 나고 자란, 윗글에서 소개된 김유헌 님의 안내로 오래전 당캐인 대평포구로 향하던 공마로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분은 월라봉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월라봉 근처에서 살아오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이곳에 대한 애정과 변화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김유헌 님은 계단식 담장이 있는 지경을 ‘기정밧’이라 칭했다. 마긍골기정과 박수기정처럼 높은 벼랑이 주변에 있는 연유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