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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아찔한 절벽 위 돌무더기…왜구 침입 알리던 곳

(99) 호산봉수터·망한이샘
흙 대신 돌로 만든 호산봉수대
왜란 이후 방어시설 다수 축조
과수원 경작 때 사용할 정도로
물 풍부하게 솟았던 망한이샘
음용수통·빨래통 등 흔적 발견

 

ᄃᆞ래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월라봉은 표고 201m, 둘레 4186m, 면적 81만8809㎡로 감산리(1148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두 개의 화구로 이루어진 월라봉은 오랜 세월 침식을 받아 형성된 복합형 화산체이다.

오름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다래나무가 많다고 하여 다래의 제주어인 ‘ᄃᆞ래’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월라는 ᄃᆞ래의 이두식 표기법에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 고구려의 달(達)에서 유래한다는 언어학적 분석도 전하는데, 도래는 ‘높다, 위대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또 하나의 설로, 화순리에서는 월라봉 모습이 마치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둥근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월라봉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오름의 모든 사면은 비목, 팽나무, 탱자나무와 해송 등 잡목으로 우거지고, 남서 사면 화구 안에는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사면 위쪽엔 대흥사라는 절이 있고, 절 남서쪽 아래에 망한이물(望漢泉)이라 불리는 샘이 2010년 전까지 용출되다가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아쉬운 점은 호산봉수터가 있는 곳은 사유지에 속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지정 문화재인 호산봉수터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월라봉 북쪽으로는 천연기념물인 안덕계곡을 품은 통세미 마을 감산리가, 동쪽으로는 솔목천과 박수기정과 바다를 품은 용왕난드르 마을 대평리가, 서쪽으로는 황개천의 계곡물길과 선사유적지를 품은 번내마을 화순리가 있다. 풍수에서 이르길, 물이 돌아들면 혈을 이루고 산이 돌아들면 용을 이룬다고 한다.

서쪽으로는 산방산·가시악·녹남봉·모슬봉이, 남쪽으로는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서남쪽으로는 송악산과 가파도와 형제섬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렇게 경관이 아름다운 월라봉에 제주의 축소판 같은 다양하고 수많은 역사문화가 깃들어 있었다.

참고로, 같은 이름의 월라봉(또는 월라산月羅山)이 서귀포시 상효동 산1번지 일대에 있다. 상효동에 위치한 월라봉에는 제주 유일의 감귤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호산봉수대 등 관방시설과 망한이샘

월라봉 동남쪽에 위치한 박수기정 위의 평탄지에 이두어시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두어시망(감산리 1057번지)이라 불렸던 호산(壕山)봉수는, 월라봉 박수기정 남쪽에 펼쳐진 바다가 해자 역할을 한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굴산봉수 또는 이두봉수라고도 불린 호산봉수는 서쪽의 송악산 저별봉수(대정읍 상모리 산2-5)와 동쪽의 구산봉수(서귀포시 하원동 1806)와 교신하였다. 구산봉수와의 직선거리는 10.7㎞, 저별봉수와는 6.8㎞로,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1653년에 편찬된 탐라지와 18세기에 편찬된 증보탐라지 등에 ‘이두어시망(伊頭於時望) 봉수대는 현청에서 동쪽으로 25리 거리에 있다. 예전에는 군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해안으로 이설하였다. 동쪽으로 굴산봉수대와 호응하고 서쪽으로 저별봉수대와 호응한다.(自縣東距二十五里 舊在軍山 今移海岸 東應窟山 西應貯別)’라고 기록되어 있다. 월라봉에 있던 이두어시 봉수대는 ‘이두봉수’ 또는 ‘호산봉수대’로도 불린다.

호산봉수는 1439년(세종 21)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구축된 방어시설로, 처음에는 군산에 두어 굴산봉수라고 했다. 군산 아랫마을인 동난드르(하예2동 1729) 바닷가 지역을 연디왓이라 부른다. 이는 이두어시 봉수대와 호응하는 당포(唐浦)연대가 위치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봉수대는 일반적으로 산 정상부에 주위 지형보다 높게 흙을 쌓아, 이웃하는 봉수·연대와 교신하던 군사시설이었다.

호산봉수가 여러 봉수와 달리 특이한 점들은, 월라봉 정상이 아닌 박수기정에, 흙이 아닌 돌로 축조된 점이다. 봉수가 월라봉 정상에 위치한다면 군산에 가로막혀 다른 봉수와의 교신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인해 지형이 낮으나 다른 봉수와 연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연석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안을 선택하여 구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반경 9.5m 원형으로 구축된 호산봉수는 다른 봉수대에서 볼 수 없는 돌을 사용하여 구축되었다. 돌로 쌓은 호산봉수터는 흙으로 쌓은 다른 봉수대에 비해 규모가 훨씬 적은 편이다. 자연석을 안팎으로 축조하여 잔돌끼움과 허튼층쌓기로 벽 높이는 외벽 2m, 내벽 1m 폭은 2m 정도이다.

△망한이물과 마을을 잇는 소롯길=월라봉 남서쪽 사면에 위치한 대흥사(감산리 849)라는 절 근방에는 망한이물(望漢泉)이란 샘이 있다. 망동산에서 망을 보던 망한이(망직이)들이 이용하던 샘에서 연유한 지명이다.

1950년대에 세워진 대흥사에서는 망한이샘에서 솟는 물을 이용하여 과수원을 경작할 정도로 물이 넘쳤다고 한다. 3단의 물통을 만들어 음용수통과 야채와 쌀 씻는 통과 빨래통 등으로 사용하였던 흔적이 최근 답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특히 철망으로 두른 밭 입구와 잡목으로 우거진 밀림지대를 안덕면 주민자치위원장(양재현)과 답사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마을과 절 사이 왕래하던 소롯길(감산리 1954번지 일대 7000여 평)로, 건설교통부 소속의 국유지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9진 25봉수대 38연대 구축=조선초 왜구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있던 연해읍성들이 정비되고, 전라도 소속이었던 제주도에서도 1439년 제주도안무사 겸 목사인 한승순의 건의에 의해 대대적인 관방시설 정비가 이루어져, 수산·차귀·서귀 방호소에 성곽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1510년 발생한 삼포왜변을 전후하여 제주목사 장림의 건의에 의해 제주목의 조천관포·김녕포·애월포·명월포, 정의현의 서귀포, 대정현의 동해포(색달과 대포 지경)에 성을 축조한

다.

특히 우도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김녕방호소를 별방(하도)으로 옮겨 축성한다. 1510년 삼포왜변, 1555년 을묘왜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제주도에서는 9개의 진인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의 방어시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듯 조선초기 방호소 또는 진으로 불려졌던 곳에는 조선 중·후기를거치며 9진으로 정착되고,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된다.

통신시설로는 산악을 연결하는 25봉수대와 해안선을 후망하는 수많은 연대(나중 38연대로 정착)가 이루어지며, 고려시대 이후로 해안방어를 위해 쌓은 환해장성이 조선시대에도 개축 또는 증축된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