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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사연 많기로 오름 중 으뜸…역사적 가치 높아

(97) 10개 비경과 비사
안덕계곡 등 아름다운 경관
다양한 유적지도 남아 있어
바위 뚫어 만든 김광종 수로
돌로 만들어진 호산봉수 터
일제가 파헤친 갱도진지 등

 

아름다운 경관인 안덕계곡·솔목천·박수기정을 품고 있는 월라봉은 오래된 마을인 감산리·대평리·화순리 또한 품고 있다. 제주도 360여 오름 중 다양한 역사문화를 품은 오름으로는 월라봉이 으뜸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이러한 연유로 ㈔질토래비에서는 안덕면 주민위치위원회와 감산리·대평리·화순리와 더불어 지난 7월 5일, 5자(기관) 협약을 맺고 제주의 역사문화를 공유하려 지역주민들과도 함께 나서려 한다.

월라봉에 산재한 역사문화의 현장들을 찾아가려면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꽤 넓은 월라봉 역사문화의 현장을 이어주는 걷는길은 아직 조성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호산봉수터는 사유지에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13세기를 전후하여 제주선인들에 의해 조성된 질과 계단식 논밭을 두른 담장은 수풀에 가려 여간해선 볼 수가 없으며, 특히 김광종 곤밥하르방이 1840년 전후하여 바위를 뚫어 조성한 물길은 황폐화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 

수많은 볼레낭들이 있어 볼레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월라봉을 최근 십여 차례 찾았다. 필자가 솔목천 심산유곡을 헤매던 어느 날엔 어딘 가에 휴대폰을 빠뜨렸다. 며칠간 폰을 찾으며 월라봉을 누볐더니 ‘이 금도끼가 네 거냐?’하고 묻는 산신령의 환청도 들렸다. ‘아니우다. 저 껀 맨날 듣는 양지은 노래가 이신 휴대폰이우다.’ 하니, ‘거 잘 되었져. 나도 좋아하는 가수난, 당분간 나한티 맡기라.’라는 대답도 들리는 듯했다. 

구글 추적기가 알려준 밭에는 유채꽃이 만발하여 벌과 나비들이 희롱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기를 잃어도 얻는 게 많으니 월라봉은 필자에게 금도끼·은도끼 모두를 준 셈이다. 그토록 찾은 월라봉이 보여준 풍광 중에서 고심하며 고른 10개의 비경과 비사는 다음과 같다. 

▲김광종 곤밥 하르방이 바위를 뚫어 만든 관개수로

안덕계곡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 버리는 물이 아까운 김광종은, 특별한 공법으로 1830~40년대 주민들과 함께 화순리 동녘 황개천(속칭 도채비빌레)의 바위를 뚫어 만든 수로를 활용하여 5만여 평의 논밭을 일궜다. 김광종 수로공법은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에게 전해져 20세기 초 천제연 도수로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포(唐浦)인 대평포구로 가는 질과 계단식 농경지 밭담길

탐라에서 키운 말들을 원나라와 명나라 등지로 실어 가던 질 흔적들이 월라봉에 남아 있다. 수목 밀림으로 뒤덮힌 돌담 질은 최근 동행한 질토래비 이사들과 안덕면 주민자치위원회가 찾아 선보이는 길이기도 하다. 질 서녘에는 이웃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려 박수기정 절벽을 징으로 쪼아 만든 길인 조슨다리 흔적도 있다.

▲흙이 아닌 돌로 만든 호산봉수 터

월라봉에는 이두어시망, 또는 호산(壕山)망으로도 불리는 봉수가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하려 바다를 경계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산재한 25개 봉수는 대부분 흙으로 쌓아졌으나, 일행들과 함께 수풀을 걷어낸 망동산에는 돌로 쌓인 호산봉수대가 또렷하게 그 형상을 드러내었다. 인근의 대흥사라는 절에는 망지기들이 마셨던 샘물인 망한천(望漢泉)의 흔적도 있었다. 

▲일제가 파헤친 7곳의 갱도진지

전망 좋은 곳곳마다 제주선인들을 강제동원하여 뚫어놓은 진지들이 일제의 만행을 대변하고 있었다. 월라봉 동쪽 가까이 있는 군산과 화순리 곶자왈 근처에 없는 듯 있는 논오름에도 일제가 파헤친 갱도진지들이 있었다. 
 

 

 

▲심산유곡에서 만나는 폭포수와 왕대왓

 물소리 새소리 들리는 계곡을 걸으니,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고 탄성이 연발되기도 했다. 선인들이 가꾼 왕대왓 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와, 자그마한 물줄기들이 모여 내는 폭포수 소리가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달려주기도 했다. 

▲주민들의 삶이 깃든 전설과 유배인 이야기

대평리의 또 다른 이름인 용왕난드르는 용왕의 아들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숨어 있는 골짜기인 솔목천의 선비석(선비기돌)과 선녀바위 전설 또한 애달프다. 감산리 등지에 살았던 오시복·임징하·임관주 등의 유배객들도 월라봉을 거닐며 유배의 설움과 애달픔을 달래기도, 노래하기도 했으리라. 

▲솔목천의 청정계곡과 기암괴석

높다란 바위로 막힌 마궁굴 주변의 풍광을 만난 것은 행운이고 발품이 안겨준 귀한 선물이었다. 반딧불이 서식지와 함께 우렁이와 다슬기를 키우는 습지가 이곳에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렁인다. 

▲안덕계곡 상류에 위치한 남반내 일대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안덕계곡 주변에는 오래전 마소와 함께 오가는 외국인이 들러야 하는 국경검역소 같은 남반내가 있었다. 남반이란 몽고·고려 등지에서 대평포구를 통해 오가던 이들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벼슬아치인 듯하다. 안내판에 쓰인 군마훈련소·공케·질·공마로(貢馬路)라는 어휘에서도 이곳의 오래된 역사문화를 엿볼 수 있다. 

▲월라봉 주변의 선사유적지와 지석묘

기원 전후 3세기 즈음 선사인들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진 월라봉 냇가 주변에서 삶의 터를 일구었으리라. 화순리 남제주화력발전소 증설과정에서 시행된 발굴조사 결과, 이곳은 기원전·후 철기시대에 번성했던 대규모 마을 유적임이 밝혀지고, 또한 주변 논밭에 묻혀있던 지석묘 등도 발견되었다. 

▲박수기정 해안 풍광과 절벽 뚫고 흐르는 물길

바가지 닮은 절벽 암반에서 솟는 물인 박수와 절벽의 제주어인 기정이 만나는 박수기정 해안은,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페퍼라이트라는 화산쇄설물도 있어 지질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이곳엔 저승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 돋는 집채만 한 암석들과 해녀들이 불턱으로 사용했던 바위그늘 등도 있었다. 

25만여 평의 월라봉에 산재한 질과 물길, 그리고 계곡길 등을 따라 걷고 걸으니 자연과의 대화에서 얻는 기쁨이 풍성하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